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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가는 책의 향기]시대를 통찰하라, 시대를 향해…

입력 | 2007-05-26 03:07:00


From: 최소연 전시기획자·접는 미술관 대표

To: ‘사나운 개’를 기르는 젊은 미술가들에게

어느 날 ‘사나운 개’가 등장했다. 네 작업노트 안에서 만들어낸 멋진 주인공 ‘사나운 개’는 누군가가 “착한 개!”라고 부르면 으르렁거린다. 20대 초반의 젊은 미술가의 노트에서 이 ‘사나운 개’가 앞으로 어떻게 길러질지 나는 무척 궁금하다. 착하고 순종적으로 길들여져서 도무지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애매모호한 사람들에게 네 작품을 소개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사나운 개가 어떤 책들을 읽으면 더 사나워질지 상상하면서 책을 추천한다.

1990년대 중반 미술에 대해 총체적으로 의문이 들기 시작하던 때 만난 책이 조한혜정의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읽기와 삶읽기1, 2’(또 하나의 문화)다. 이 책은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 없이 무작정 미술가를 꿈꾸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수작인지 깨닫게 해줬다. 이 책에서 말하는 ‘식민성’이란 자신의 문제를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이 화두는 이제 막 예술을, 미술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무척 중요하다. 자신의 작업 안에 들어와 있는, 어쩐지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다른 사람의 언어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작업은, 나만의 세계관을 구성할 수 있다는 통찰을 갖게 한다.

나는 ‘사나운 개’가 자신만의 성질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반갑다.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사나운 개’가 자신을 중심에 세우고 휘둘러 세상을 표현할 수 있는 통 큰 배포를 가졌으면 한다. 그래서 나는 예술의 태동을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본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이상 한길사) ‘극단의 시대’(까치)를 추천한다. 미술이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면 동시대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예상할 수 있게 하는 굉장히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들을 ‘사나운 개’의 머리맡에 놓아라. 책의 부피에 억눌리지 말고 그 부피로 과거를 가늠하고 인정하고 그리고 눈을 떠라. 사나워져라!

나는 지식으로 쓴 글보다는 이 세계에 대한 집요한 질문으로 써 내려간 책들에 손이 간다. 코디 최의 ‘동시대 문화의 이해를 위한 20세기 문화지형도’(안그라픽스)는 책의 맨 뒤편에 저자가 직접 그린 문화지도가 장관이다. 현재 소비되고 있는 문화와 우리 문화의 관계, 그리고 새롭게 생산해야 할 문화의 위치를 분별력 있는 지리적 통찰력으로 제시한다. 이 지도는 시대정신으로 무장한 ‘사나운 개’가 길을 찾는 데 유용한 쓰임새가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만화가 장 마르크 레제르의 ‘빨간 귀’(열린책들)는 사소한 잘못 때문에 늘 귀가 빨갛게 되도록 얻어맞는 기막힌 캐릭터다. 사회 심리를 정교하게 묘사한 작가로도 정평이 난 레제르의 만화는 기발한 발상과 통쾌한 풍자정신으로 자꾸만 얻어맞게 되는 빨간 귀를 통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모순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나운 개’가 ‘빨간 귀’를 만난다면 근사한 친구가 되리라.

우리가 한 예술가를 통해 기대하는 것은 이 세계를 바라보는 통찰력 있는 시선일 수도 있고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그 무언가를 표현할 상상력일 수도 있다. 무엇이 아직 제대로 말해지지 않았는지, 이 시대에 무엇을 목격하고 있는지 자유롭게 표현하라!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바를 세상에 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미술가의 힘이다. 나는 ‘사나운 개’를 통해 바라보게 될 새로운 세계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