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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시간속에 켜켜이 쌓인 기억… 추상화가 김웅展

입력 | 2007-05-28 03:05:00

미국 뉴욕에서 활동 중인 추상화가 김웅 씨. 오랜만에 고국에서 전시회를 여는 그는 중후하면서도 세심한 화면으로 오랜 기억의 흔적을 더듬는다. 사진 제공 예화랑

김웅 씨의 전시작 ‘무제 4-07’. 태극무늬 등 다양한 기호와 빛바랜 황토색이 아득히 먼 옛날의 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진 제공 예화랑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추상화가 김웅(63) 씨를 만났을 때 손톱 밑에 두껍게 낀 물감 때부터 먼저 보였다.

3년 만에 고국에서 여는 전시를 위해 수일 전 귀국했는데도 물감은 ‘여전히 작업 중’이라는 신호등을 켜고 있는 듯했다.

김 씨는 “평생 색과 싸우고 있으니 지워질 리 있나”라며 웃었다.》

그는 1969년에 뉴욕으로 가서 예일대 미술대학원을 나온 뒤 줄곧 현지에서 내면의 심상을 담은 진지하고 견고한 추상 작품을 발표해 왔다. 1980년대에는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전시에는 40점을 선보이는데 모두 ‘무제’이지만 ‘체크무늬로 피어진 꽃’ ‘접시 위의 얼굴’ ‘풍경과 나의 관계’ 등 세 범주로 나뉜다. 전시작은 한결같이 중후하고 거친 붓질과 두꺼운 색감으로 빛바랜 기억과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다.

낡은 장판이 깔린 황토방 같은 토속적인 냄새도 풍긴다.

칠하고 긁어내는 방식으로 아득히 먼 옛날의 기억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미술평론가 제러드 페가티는 “김웅의 그림은 기억을 저장해 놓은 보물 상자 같다. 그래서 그의 캔버스에서 시간을 발견하게 되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현대 미술의 시각에서 보면 그의 추상은 고전이고 새롭지 않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자기 세계를 쌓아 나가야 한다”며 “재료든 작품이든 그 작가의 냄새야말로 작가의 생명”이라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농부가 밭을 갈 듯 꾸준하게 경작해 가는 과정이나 광부가 광맥을 캐 들어가는 고된 작업에 비유된다”(오광수)는 평을 듣는다.

‘무제 3-07’도 풍경을 담은 작품으로 꼬박 3년이 걸렸다.

길쭉한 이 그림에는 하늘과 땅, 가운데의 회색 풍경이 서로 기하학적 대비와 논리적 질서를 자아낸다.

‘무제 11-07’은 큰 화면에 배가 덩그렇게 떠 있는데, 그 배경에는 옛 기억을 더듬는 듯한 손질 자국이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무제 4-07’은 벽화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 안에는 보자기나 호미 같은 것도 있고 태극무늬도 있다.

이런 작품들은 어떻게 관객과 소통할 수 있을까?

“마티스는 무인도에서 화가가 되느니 그림을 안 그리겠다고 했습니다. 나도 소통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그림은 보는 이의 해석에 따라 다르지만, 그림을 모르는 사람들이 전시에서 정확하게 ‘작가가 고생한 그림’을 짚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 소통의 경이라고 할까요?”

김 씨는 뉴욕에서 40여 년 활동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한때 토큰이 없을 정도로 고생했지만 26번의 개인전을 치르면서 뉴욕 화단에서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도 성과를 얻었다. 그는 “이제야 뭔가 보이고 방향이 정해진 것 같다”며 “이제 세계 미술계와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왔으니 계속 밀어붙이겠다”고 말했다.

육순을 넘긴 그의 말에는 세월에 대한 겸손과 나이를 태우는 열정이 오롯이 새겨져 있었다. 전시는 6월 14일까지 예화랑. 02-542-5543

허엽 기자 h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