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코리안 특급’ 박찬호 선수가 민망할 정도로 추락하고 있다. 한때 미국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던 그였지만 이제는 점점 잊혀진 존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박찬호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자신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서슴지 않는 소속팀 감독을 향해 “나를 우습게보지 말라”면서 이를 악다물고 있다.
그 말이 계속 귀에 맴돈다. 평소 박찬호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는 무언가 남다른 데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야구인생이 절정을 향해 달리던 무렵인 2000년 9월 박찬호는 “타자를 삼진으로 잡으면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욕심을 내지 않아야 좋은 공을 던질 수 있다”고 말했다. 어깨 힘을 빼야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다는 박찬호의 야구철학은 탐욕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정치 군상을 향한 통쾌한 일갈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까닭에 박찬호가 그동안의 부진을 씻고 보란 듯이 재기할 수 있기를 누구보다 고대했다. 올해 야구 시즌의 개막을 앞두고 박찬호에 관한 국내외 언론 보도를 유심히 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대체적으로 미국 전문가들은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인색하다 못해 야박스러울 정도였다.
쓴소리가 결국은 약 되는데
국내 언론에서는 팔이 안으로 굽는 듯한 보도가 많았다. 이를테면 ‘박찬호는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실시한 마지막 피칭에서 직구 최고 시속 149km를 기록하며 완벽한 부활을 예고했다’는 기사가 그렇다.
박찬호를 잘 아는 어느 미국 대학 감독의 말을 빌려 “체력적으로 강해졌고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전성기 수준의 실력을 되찾았다”고 평가한 신문을 읽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가 최종적으로 자리를 잡은 뉴욕 메츠가 ‘더 큰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는 분석기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 기대는 얼마 못 가서 무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박찬호는 지금 이름도 모를 마이너리그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다.
물론 이왕이면 밝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글을 써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독자부터 그런 글을 원한다. 행여 우리 선수들에 관한 어두운 기사를 쓰면 애국심 부족을 탓하는 비난이 쇄도한다.
그러나 언론의 사명은 진실을 보도하는 것이다. 독자가 원하는 대로, 아니 독자의 구미에 맞게 기사를 각색한다면 그것은 언론이 아니다. 때로 독자를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참된 언론이다.
진정 박찬호를 위한다면, 듣기 싫은 말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당장에는 쓸지 몰라도 끝내 약이 되고 마는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박찬호는 뉴욕 메츠 감독을 향해 ‘나를 우습게보지 말라’면서 대들었다. 박찬호를 우습게보았다는 점에서는 장밋빛 전망으로 독자를 흥분시킨 일부 언론도 다르지 않다. 어쩌면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대중이 최고 권력자인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중에 대해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듣기 좋은 말이 난무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를 ‘아첨의 정치’라고 규정했다. 정치인이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한다는 것이다.
대중도 나중에 삼수갑산에 가는 일이 있더라도 당장 달콤한 말을 해 주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건강하지 못한 합작을 깨기 위해 온몸을 던졌다. 대중의 아픈 곳을 콕콕 찌르는 등에의 역할을 자임했다. 끝내 그는 대중의 미움을 사서 독배를 들어야 했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를 진정한 정치가로 평가한다.
정치인 달콤한 공약 경쟁 걱정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니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한 정책경쟁이 뜨거워진다. 달콤한 공약을 늘어놓았다가 나 몰라라 하는 일이 반복될 것 같아 걱정이다. 현명한 국민이라면 아첨꾼을 골라 내칠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쓴소리 하는 사람들을 주목해야 한다. 국민을 우습게 보는 자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국민의 책임이다.
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