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순 경찰청장 ‘책임론’의 핵심에는 경찰의 숙원인 ‘수사권 조정 문제’가 놓여 있다.
검찰의 지휘에서 벗어나 단독으로 수사권을 행사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일선 경찰관들은 경찰청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을 지휘했던 핵심 간부들을 검찰에 수사 의뢰함으로써 경찰 수사의 공신력을 무너뜨렸다고 성토하고 있다. 결국 청와대의 지시를 막아내지 못한 경찰 총수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 사건이 각종 의혹에 휩싸인 데는 경찰 수뇌부의 ‘오판’과 수사 실무자 간의 ‘공명심 다툼’도 큰 몫을 한 만큼 자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수사권 조정 문제가 ‘뇌관’=평소 말을 아끼는 일선 경찰서장(총경)들까지 나서서 수뇌부를 향해 비난을 서슴지 않고 있다.
서울지역의 한 경찰서장은 “이 청장이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지휘자로서의 신망을 잃었다”며 “자기만 살겠다고 실무진을 내친다면 누가 그 지휘자에게 충성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 청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글에선 이 청장과 허준영 전 경찰청장을 비교하는 내용이 적지 않다. 허 전 청장은 재임기간 수사권 조정을 강력하게 추진한 반면 이 청장이 들어선 이후에는 이 문제가 거의 공론화되지 못한 데 따른 불만이다.
특히 검찰에 수사 의뢰키로 한 김학배 전 서울청 수사부장은 수사권 조정 문제를 놓고 검찰과 치열한 협상을 벌였던 2005년 당시 경찰청 기획수사심의관으로 경찰 협상단을 이끌었다.
서울지역의 또 다른 경찰서장은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것은 경찰 스스로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이런 상황에서 누가 경찰의 수사권 독립 주장에 힘을 실어 주겠느냐”고 말했다.
경찰대 총동문회장인 임호선(경찰대 2기·중앙경찰학교 교무과장) 총경은 “28일부터 서울청 소속 후배들을 만나 의견을 들을 생각”이라며 “현재로선 성명서 발표 등 집단행동을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반면 서울청의 한 계장(경정)은 “수뇌부의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이첩과 수사 실무자 간의 공(功) 다툼이 부실 수사의 본질”이라며 “누구에게 책임을 묻기에 앞서 자숙해야 한다”고 말했다.
25일 사임한 홍영기 전 서울청장도 퇴임식 뒤 가진 서울청 간부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이런 후폭풍을 예상한 듯 “제발 조직원끼리 싸우지 말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분주한 검찰=검찰은 대기업과 경찰, 조직폭력배의 유착 의혹이 제기된 만큼 경찰의 수사 착수부터 종결까지의 전 과정을 철저하게 재검토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경찰청이 자체 감찰 결과를 발표한 25일 서울중앙지검은 기존에 보복폭행 사건을 수사해 온 형사8부(부장 서범정) 외에 마약조직범죄수사부 소속 검사들을 전격 투입했다.
28일 수사부서가 지정되면 검찰은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 남대문서로 첩보가 이첩되는 과정 △한화 측의 경찰 고위 간부를 통한 수사 무마 시도 여부 △경찰 지휘부의 늑장수사 지시 여부 △조직폭력배 오모 씨의 출국 경위 등을 차례로 점검할 예정이다.
한편 형사8부는 김 회장의 1차 구속수사 시한이 27일 만료돼 구속기간을 열흘 추가 연장하기로 했다. 검찰은 2차 구속수사 시한을 앞둔 다음 달 4, 5일경 김 회장과 사건 관련자 등을 일괄 기소할 예정이다.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