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열 기침 가래에 따른 호흡 곤란으로 입원했다. 의사는 중증 폐렴이라고 했다. 정맥주사와 항생제 투여, 산소 흡입으로 해결되지 않자 기관(氣管) 절개를 권했다.
그는 ‘목소리를 잃을 수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고통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 보겠다’는 심정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병세는 더 악화됐다. 그의 병은 폐렴이 아니라 손쓰기엔 너무 늦은 말기 식도암이었다.
이제 그는 가느다란 튜브에 생명을 맡겨야 했다. 증상에 대해 물어보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힘이 없어 필담도 힘들었다. 그는 자기 몸이 서서히 물체처럼 변한다고 생각했다. 배뇨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굴욕과 고통의 시간 속에서 그는 자신이 불과 얼마 전까지 ‘존엄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잊어야 했다.
‘뭘 하든 고통스러우니까 빨리 편하게 갈 수 있도록 해 줘! 너희들 맘대로 내 몸을 주물러 대지 말란 말이야.’
속으로 이렇게 외쳤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결국 하루하루 불신과 분노만 키운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병원에서 그가 보낸 마지막 7주는 일흔여덟 생애 중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여기 소개한 ‘그’는 일본의 외과의사 야마자키 후미오 씨가 쓴 수필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김대환 옮김·상상미디어)에 나오는 실제 인물이다. 1만여 명의 환자를 진찰하고 300여 명의 죽음을 지켜보았다는 저자는 책에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말기 암 환자들에게 병원은 과연 마지막을 보내기에 적당한 곳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를 살리려고 애쓰는 것은 의사의 당연한 책무이지만 때로 그것이 ‘연명 지상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의학의 희생자로 내모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막대한 의료비에 허덕이는 말기 암 환자들이나 인간의 존엄을 입에 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무의지 상태에서 온몸에 의료기기를 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남은 생에 대한 정리는 고사하고 ‘마지막 순간을 어디에서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영혼까지 지치기 쉽다.
본보 2007년 5월 19일자 A16·17면 참조
▶“癌? 같이 살죠 뭐… 끝까지 포기 안 해요”
▶웰빙만큼 중요한 웰다잉… “공부하세요”
마지막에 대한 선택은 전적으로 환자 몫이지만 의사의 사명은 1분, 1초라도 환자의 목숨을 연장시키는 것이므로 이에 힘쓰는 의사들을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병원에 가는 순간 각종 법적 규제에 묶여 환자의 자유의지가 개입될 가능성이 준다는 데 있다. 환자는 병원에 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치료를 받게 된다.
우리도 연명치료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시대 변화로 ‘병원에서 임종하는 사망자가 전체의 절반’(서울대병원 허대석 암센터 소장)에까지 이르는 상황이라니 서서히 ‘죽음’에 대한 다양한 선택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 어떤 것이든 개인에게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 삶의 질은 개선된다. 죽음의 문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에서는 ‘생존 유언(living will)’을 통해 생명유지 장치 제거, 강제 영양 공급 등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받지 않을 뜻을 환자가 밝힐 수 있고 만약 혼수상태에 빠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우면 법적 대리인을 지정할 수도 있다고 한다.
본격적인 고령화 시대로 접어든 우리도 이제 ‘품위 있는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떻게 마지막에 대처할 것인지 ‘제도적으로’ 고민할 때다.
허문명 교육생활부 차장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