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지방법원 법원장이 국제 전화사기(보이스 피싱·Voice Phishing)에 걸려 6000만 원을 사기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기단은 그동안의 사건과는 달리 미리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자세하게 파악한 것으로 드러나 범죄수법이 갈수록 치밀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화사기가 본격화된 지난해 6월부터 올 1월까지 7개월간 전국에서 접수된 전화사기 피해는 1606건에 이른다. 특히 2, 3월 두 달간 경찰에 800여 건의 피해가 접수됐고, 4월 한 달 동안만 641건이나 발생했다.
▽대담한 범행=한 지방법원의 K 법원장의 서울 자택으로 협박전화가 처음 걸려 온 것은 지난달 28일 오전 10시 50분경. 40대로 추정되는 남자가 "공익근무 중인 아들(24)을 납치하고 있으니 500만 원을 송금하라"고 했다.
K 법원장은 이날 오후 국회에서 열리는 입법 관련 세미나 참석을 위해 자택에 대기 중이었으며 부인은 딸이 유학 중인 프랑스를 방문 중이었다. 아들은 이날 오전 7시경 출근을 한 상태.
K 법원장은 범인이 아들의 비명이라며 "살려 달라"는 목소리를 들려줘 진짜 납치된 줄 알고 혼비백산해서 즉시 지방에 있던 비서에게 송금을 지시했다. 범인이 계속 K 법원장과의 통화를 요구해 자신의 휴대전화로 비서에게 연락한 것. 비서는 우선 자신의 돈으로 500만 원을 송금했으며 범인의 500만 원과 1000만 원 추가 송금 요구도 받아들여 송금했다.
범인은 또 다시 3000만 원을 요구해 K 법원장은 비서에게 다시 송금을 지시했다. 비서는 거액을 감당할 수 없어 법원 사무국장에게 보고했다. 사무국장은 Y 수석부장판사와 상의한 뒤 검찰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 오전 11시 50분 같은 지역의 지검 P 검사장을 찾아가 상의했다.
Y 판사와 P 검사장이 만나는 사이에도 범인이 계속 협박하자 K 법원장은 송금을 독촉해 Y 판사는 낮 12시경 3000만 원을 마이너스 통장에서 인출해 송금했다.
하지만 범인은 5000만 원을 추가로 요구했다. 이에 검찰은 "너무 많은 돈을 보내면 더 위험해질 수 있다"며 만류해 오후 1시 반경 우선 1000만 원을 송금했다.
▽허술한 대처=K 법원장은 Y 수석부장과 비서가 아들 휴대전화번호를 물었지만 "상대방이 '아들 휴대전화로 수사기관에서 전화가 오면 위험할 수 있다'고 협박했다"며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사이 검찰의 연락을 받은 경찰이 K 법원장 아들 주민등록번호를 확인, 통신회사를 통해 휴대전화번호를 알아내고 통화가 이뤄져 납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 시간은 오후 2시경.
하지만 5차례에 걸쳐 범인에게 송금된 6000만 원은 서울 근교의 금융기관에서 모두 인출된 뒤였다.
경찰 관계자는 "K 법원장이 납치됐다는 아들 휴대전화 번호만 법원 직원들에게 알려줬다면 피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3시간여 동안 계속 통화한 K 법원장 자택 전화를 감청했더라면 범인들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검찰은 또 지방법원 관계자들이 찾아와 상의한 이후에도 전화사기로 의심하지 않아 결국 범인에게 3000만 원과 1000만 원 등 4000만 원이 추가 송금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게다가 납치범의 경우 위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짧게 통화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범인은 3시간 이상 통화를 계속했지만 법원과 검찰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중국 사기단 추정"=검찰은 범인들이 인터넷 전화로 3시간이나 끊지 않고 K 법원장 장시간 통화를 한 점으로 미루어 위치추적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중국 전화사기단의 범행으로 추정하고 있다.
검찰은 또 "범인들이 아들의 출신대학과 근무처 등 인적사항을 잘 알고 있었다"는 K 법원장의 말에 따라 한국인이나 국내에 들어와 있는 조선족 하수인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또 지방에 있어야 할 법원장이 서울 자택에 머무는 시간대와 집 전화번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국제 전화사기단이 범행 대상자를 미리 골라 인적사항을 알아낸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송금된 돈이 인출된 금융기관의 폐쇄회로(CC)TV를 확보했으며, 중국인 이름으로 개설된 계좌를 추적 중"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또 지금까지의 드러난 정황으로는 범인이 통화를 한 법원장의 직업까지는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K 법원장은 피해를 당한 다음날 출근해 직원들에게 "수 십 년간 재판을 해온 나도 이렇게 사기를 당하다니 참으로 황당하다"고 말한 것으로 법원 직원들은 전했다.
울산=정재락기자 rak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