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독을 열다 - 김평엽
간장독 속에 어머니 들어가 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을 달인 말씀 그득 채우고
물빛 고요히 누워 있다
세상에서 다지고 다진 슬픔들
덩어리째 끌안고 사뭇 까맣게 숯물 되었다
손길 닿지 않는 깊이에서
덜 익은 상처 꾹꾹 눌러 매운 숨결 풀고 있다 씻고 있다
대바람 소리 밀물치는 뒤란
다소곳 가을 풍경 삭이는 어머니
세월 솔기마다 튿어낸 한숨, 그 위에
별빛 고운 어둠 감침질하고 있다
칠십 년 우려낸 세월
욱신거리는 것 한 바가지 퍼내고
생의 보푸라기 갈앉히고 있다
구름 조용히 베고 누운, 다 저문 저녁
이제야 정수리의 부젓가락 뽑아내고
응달 되어버린, 어머니
세상에 단풍서리 저리 곱게 내리는데
검게 삭은 애간장, 그 맑은 수면을 건너는
내 울음 찬송가보다 싱겁다
- 시집 '나비, 봄을 짜다'(종려나무) 중에서
다지고 다진 슬픔만 있었으랴, 입이 귀에 걸리는 기쁨도 더러 있었으리라. 까맣게 탄 숯 가슴만 있었으랴, 고동치는 설렘도 더러 있었으리라. 세월 솔기마다 한숨만 내쉬었으랴, 더러 뜨거운 감탄사도 내뱉었으리라. 늘 어두운 그늘에만 계셨으랴, 더러 따뜻한 양지 볕도 쬐긴 쬐었으리라. 그러나 자식을 낳고, 기르고, 키워온 부모의 마음 바탕은 언제나 근심과 걱정과 가없는 희생이었음을, 자식이 부모가 되면서 알게 된다. 간장독 속에만 계시겠는가, 어머니를 떠나보낸 사람은 안다. 눈에 밟히는 모든 사물이 어머니의 얼굴로 다가오는 것을.
―시인 반 칠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