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선거를 약 7개월 앞두고 관가에도 서서히 정치바람이 불고 있다. 몇몇 고위 공무원은 공직생활의 운명을 걸고 각 당 대통령 후보 캠프에 다양한 방식으로 물밑 줄 대기를 시도하고 있다. 31일 정부과천청사 모습. 과천=변영욱 기자
《“나 요즘 머릿속이 복잡해…. 양쪽이 달라도 좀 달라야 말이지.”
경제부처의 고위급 인사인 A 씨는 올해 12월 대통령선거 이후 꾸려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어떤 정책을 내놓을지 벌써부터 고민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상황은 한나라당이 우세한 듯하지만 한나라당만을 위한 정책 대안을 준비할 수는 없다. 열린우리당을 포함한 범여권 후보가 정권을 재창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A 씨는 “어느 쪽이든 정권을 잡는 쪽에 제출할 수 있도록 두세 가지 ‘버전’으로 정책 묶음을 준비할 계획”이라며 “인수위에서 두각을 나타내 잘된 관료가 한두 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현 정부에 레임덕(정권 말 권력누수 현상)은 없다’며 공직사회를 다그치지만 이미 상당수 공무원은 차기 정부에 대비하는 물밑 작업을 벌이고 있다.》
○ 공무원들의 줄 대기 백태
“몇 년 전 은퇴한 선배 B 씨에게서 전화가 왔어. 한나라당 모 대선주자 캠프에 가 있는 줄은 알지만 한번 보자는데 거절할 수가 있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정부과천청사 한 부처의 핵심 국장 C 씨. 그는 결국 지난주 서울 강남의 한 일본 음식점에서 B 씨를 만났다. 약속 장소에는 B 씨를 모시던 선후배 관료 2명이 더 나와 있었다. 술 한 잔을 나눈 뒤 B 씨는 “모 후보를 돕기로 했으니 힘이 돼 달라”고 부탁했다.
C 씨는 “정권 교체기에는 자기 실력만 믿다간 낭패 본다는 것이 공무원 사회의 상식”이라며 “적극적으로 돕지는 않더라도 ‘좋은 관계’는 유지할 생각”이라고 털어놨다.
선배 관료를 통해 정치권과 줄을 대는 것은 공무원 사회의 가장 일반적 관행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일도 있다.
한 유력 후보 캠프의 관계자는 “안보 관련 부처의 간부, 치안 기관 관계자들이 찾아온 경우가 몇 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과 은밀히 만나 보면 보고서를 불쑥 내밀거나 ‘지금 현재 돌아가는 상황이 어떻다’는 보고까지 한다고 전했다. “언제든지 도와줄 테니 주저 말고 연락 달라”는 공무원도 있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좋게 말하면 ‘과잉 친절’이지만 사실상 유력 대선 후보에게 눈도장을 찍어 나중에 승진 등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것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 정권 교체는 역전의 기회?
현 정부와 이른바 ‘코드’가 맞지 않거나 이런저런 차별을 받아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는 공무원 중 일부는 정권 교체를 ‘역전 기회’로 인식하는 듯하다.
이른바 ‘TK(대구·경북)’ 출신인 고위 공무원 D 씨는 요즘 한나라당 대선 주자 캠프에 참여하고 있는 고향, 학교 선후배들을 조심스럽게 만나고 있다.
“YS(김영삼) 정부 때부터 DJ(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까지 14년 넘게 손해 봤어. TK 출신은 관료 사회에서 거의 씨가 말랐지. 더 손해 볼 수는 없잖아?” D 씨의 설명이다.
학연도 무시할 수 없다. 한 정부 부처에서는 모 대학 출신의 후보가 당선되면 같은 대학을 나온 E 국장이 제일 먼저 승진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반면 현 정부에 코드를 맞추며 승승장구한 공무원들은 초조한 표정도 짓는다.
현 정부에서 각종 논란을 몰고 온 정책과 관련해 ‘총대’를 메고 주도적으로 일을 추진했던 고위 공무원 F 씨는 “(제가 한나라당에 줄을 댄다고) 받아 주겠어요? 그쪽에서 보면 확실한 ‘남의 사람’인데”라며 답답한 마음을 털어놨다.
F 씨는 “야당 후보가 당선되면 은퇴 외에는 별로 길이 없다는 것을 여러 차례 대선 경험을 통해 분명히 안다”며 “고교 선배인 범여권의 모 후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 공무원 줄 대기 왜 계속될까
공무원들의 줄 대기는 대단히 은밀히 이뤄지는 것이 특징이다.
아직 현 정부의 임기가 9개월 정도 남은 상황에서 자칫 이런 움직임을 청와대에서 감지한다면 인사에서 결정적 불이익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을 감내하면서도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역대 대선 때 정치권과 직간접 네트워크를 구축한 공무원들이 자신이 줄을 댄 정파가 정권을 잡으면 고속 승진하는 등의 ‘학습효과’와 무관하지 않다.
전 정권에서 한직(閑職)으로 밀려나 있던 공무원이 차기 정권에서 갖가지 연(緣)으로 중용돼 장관이나 차관까지 오르는 사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권 교체 후 어차피 옷을 벗는다면 장관이나 차관에 오를 수 있도록 정치적 ‘베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선 후보로서도 핵심 요직에 있는 공무원은 좋은 ‘원군(援軍)’이 된다. 중요한 정보가 집중돼 있는 공무원 사회의 핵심 관료는 새 정부의 정책 대안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치 바람에 휘둘리는 공무원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이런 관행을 반드시 깨뜨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연세대 이종수(행정학) 교수는 “정권을 새로 잡은 대통령이나 그 주변 사람의 연고에 따라 인사가 이뤄지면서 고위 공무원 인사는 사실상 엽관제(獵官制)처럼 운영돼 왔다”며 “이런 관행을 타파하는 것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이승헌 기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