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가의 안보는 국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안보는 또한 우리의 자유적인 제도의 가치에도 있다. 표현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라는 훨씬 더 위대한 가치를 보전하기 위하여 당국자들은 심술궂은 언론, 강퍅한 언론, 도처에 널려 있는 언론으로부터 주어지는 고통을 감내(堪耐)하여야 한다.”
1971년 6월, 미국 뉴욕연방지방법원의 머리 거페인 판사는 ‘국방부 비밀문서(Pentagon Papers)’ 사건에서 뉴욕타임스 보도에 대한 법무부의 예비 금지명령 승인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국방부 비밀문서’는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쟁 개입 내막이 들어 있는 극비(極秘) 문서였다.
불러주는 대로 받아 쓰라
국익(國益)에 앞서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감동적으로 옹호하는 이 명언(名言)은 속 좁은 피해 의식으로 언론의 일상적인 취재활동조차 제한하려는 노무현 정부의 부끄러운 수준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자유주의 언론의 오랜 신념체계는 언론이란 권력에 불손(不遜)하고 예측 불가능해야 하며, 아주 조금은 평판이 나빠야 한다는 낭만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지지한다. 언론 자유에는 남용(濫用)의 문제가 따를 수 있지만, 넘치는 물이 두렵다고 마셔야 할 물독을 비워 둘 수 없듯이 남용을 피하려 자유를 억제할 수는 없다는 이치에서다. 오늘날 그물망처럼 짜인 정보의 쌍방향 소통체제에서 언론 자유의 남용은 의도하지 않은 실수나 본의 아닌 오보(誤報)의 경우가 아니라면 지극히 예외적이다. 비록 남용의 문제가 여전히 가볍지 않다고 해도 해결책은 언론과 시장의 자율에 맡기는 게 최선이다.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에 봉사한다. 언론 자유는 그 반대급부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 또한 현대 자유주의 언론의 흔들릴 수 없는 신념 체계다. 여기에도 ‘무엇을 알 권리인가?’라는 물음표는 붙을 수 있다. 예컨대 선정적인 보도나 프라이버시 침해, 정파적인 의제(議題) 설정까지 국민의 알 권리에 부응하느냐는 물음이다. 이는 언론 자유와 사회적 책임의 기준과 한계를 놓고 계속돼 온 논란거리이기도 하다. 다만 권력이 강조하는 사회적 책임의 뒷면에는 언론 자유 억제 의도가 숨어 있다는 점을 지나쳐선 안 된다.
민주주의에서 주권자인 국민이 그들의 공복(公僕)인 정부가 하는 일을 알아야 한다는 대전제(大前提)에는 어떤 물음표도 붙일 수 없다. 하물며 노 정부가 내세우는 ‘참여정부’의 참여란 정부가 하는 일을 국민이 알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알지도 못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참여한다는 말인가.
기자와 정부 관리를 격리하는 대신 전자브리핑으로 국민의 알 권리에 부응하겠다는 노 정부의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는 지나가던 소가 웃을 소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최근의 예로 경찰 수뇌부가 담합한 의혹을 받고 있는 ‘김승연 사건’을 기자가 취재해 보도하지 않았어도 관계 당국이 전자브리핑으로 그 전말(顚末)을 소상히 국민에게 알렸겠는가.
정보 공개를 선진화하겠다는 소리도 한국 정부의 투명성 수준이나 관료들의 자기보호 본능, 몸에 밴 비밀주의 관행 등에 비추어 실현 가능성이 낮다. 설령 정보 공개의 범위를 넓힌다고 해도 그 결정권이 공급자인 관료의 손에 있다면 ‘불러 주는 대로 받아쓰라’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를 감시해야 하는 언론의 ‘감시견(watch dog)’ 역할을 원천 봉쇄하는 것으로, 그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6월 시민항쟁’ 20주년에 민주화에 힘입어 집권한 노 정부가 민주주의의 근본인 언론자유를 통제하려 무리수를 쓰는 것은 기막힌 아이러니다. 더구나 그것이 대통령 개인의 언론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면 정부 전체의 수치(羞恥)가 아닐 수 없다. 정권은 유한(有限)하지만 수치는 무한(無限)하다.
프로야구 SK와이번스의 김성근(65) 감독은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야구든 인생이든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봐야 한다”고 했다. 노 대통령에게 선의(善意)로 당부하고자 한다. 권력이든 언론이든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