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현충일.
왜 6월 6일이 현충일이 됐을까.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1996년 동아일보에 보낸 기고문에서 “6·25전쟁을 생각하게 하는 6월과 24절기 중 제일 좋은 날이라고 하는 망종인 (6월) 6일을 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조상들은 한식(寒食·4월 5, 6일경)에는 성묘를 하고 망종에는 제사를 지내 왔다. 고려의 제8대 왕 현종(顯宗·992∼1031)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진 장병의 뼈를 거둬 역사상 최초로 조정에서 제사를 지낸 날도 6월 6일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최초의 현충일 풍경은 어땠을까. 반세기 전인 1956년 6월 6일로 돌아가 보자.
‘전몰용사 앞에 맹세하자 내일의 북진통일.’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군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에 내걸린 ‘제1회 현충 전몰장병 추도식’이라고 쓰인 현수막 옆에 나란히 서 있던 표어. 요즘 입 밖에 내면 큰일 날 ‘북진통일’이란 말이 당시에는 도도한 민심이었던 셈이다.
당시 6월 6일자 동아일보 사설 제목은 ‘현충일과 국민의 결의’.
“오늘 우리가 추모하는 근(近) 9만의 영현(英顯)은 반공투쟁에서 민족의 영원한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몸소 제물이 된 고귀한 희생임은 물론이다. 자유는 오직 생명과 피로써 이를 수호하려는 자에게만 귀속된다.”
추모식에는 공식대표로 초청 받은 유족 237명 등 총 1000여 명이 참석했다. 함태영 부통령은 “조국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젊은 생명을 버린 이 거룩한 영령에 길이 명복을 내리소서”라고 기도했다. ‘영령들이 고이 잠들라’는 의미로 취침나팔이 구슬피 울리자 곳곳에서 유가족들의 처절한 오열이 터져 나왔다.
이날 오후 2시 반경 서울 중구 정동의 덕수궁에서는 유족 좌담회가 주요 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추모 담화만 발표하고 추도식에는 참석하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시작으로 가슴속에 묻어 뒀던 절규가 쏟아졌다.
“정부가 그동안 우리(유족)를 위해 무엇을 해 준 것이 있는가.”
“지킬 수 없는 약속이면 차라리 하지 말라.”
“매년 걷어 들이는 거액의 군경원호회비는 도대체 어디다 쓰느냐.”
그로부터 51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유족의 이런 아픔을 진정 제대로 보듬었는가.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