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서해교전 당시 국군수도병원 군의관으로 부상 장병들을 치료한 이봉기 교수. 춘천=윤상호 기자
“‘넌 반드시 살려 낸다’는 다짐을 못 지켜 지금도 가슴이 아려 옵니다. 나라에 목숨을 바친 영웅과 그 가족들에 대한 무관심에 화도 나고….”
강원 춘천시 강원대 병원의 한 검사실. 방금 외래 진료를 마친 하얀 가운 차림의 이봉기(39·순환기내과) 교수의 얼굴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이 교수는 2002년 6월 29일 서해교전이 터졌을 때 국군수도병원 군의관으로 부상 장병들을 치료했다. 목숨 바쳐 조국을 지킨 꽃다운 청춘들의 절절한 고통과 슬픔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느낀 심경을 회고하던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안타까움과 울분에 깊은 한숨도 내쉬었다.
“불과 5년 전에 목숨 걸고 영해를 지킨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혀진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이 교수는 당시의 상황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퇴근 준비를 하던 토요일 오후의 갑작스러운 비상, TV 화면의 긴급 뉴스, 이어 헬기로 후송된 참혹한 모습의 부상 장병들….
총탄과 포탄 파편, 화상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신음하는 장병들을 보면서 그를 비롯한 모든 군의관은 말할 수 없는 충격과 분노를 느끼며 치료에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의무병으로 교전 현장에서 부상자들을 돌보다 가장 크게 다친 박동혁 병장을 ‘반드시 살려 낸다’는 각오로 모든 의료진이 사력을 다했다. 전신에 100여 개의 파편상과 심한 화상을 입은 박 병장을 살리려면 상처 부위의 세균 감염을 막는 게 급선무였다.
“가장 강력한 항생제를 사용하고 밤샘을 거듭한 의료진의 노력에 보답하듯 박 병장은 점차 호전돼 일반 병실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바라던 실낱같은 희망도 잠시. 박 병장은 한 달여 뒤 뇌 전체가 세균에 감염돼 힘든 투병 끝에 숨을 거뒀다.
“마지막까지 ‘아들을 살려 달라’던 어머니의 절규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의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는 서해교전의 사상자와 그 가족에 대한 정당한 예우와 보상이 뒤늦게라도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서해교전 부상 장병들을 치료할 때의 일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일기를 쓰듯 기록했다. 박 병장이 눈을 감던 날 그는 “나를 포함한 군의관들의 가슴에도 구멍이 났다”고 적었다.
200자 원고지 30장 분량의 이 글은 2003년 2월 의료전문지 ‘청년의사’가 주최한 수필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받은 뒤 세상에 공개됐다. 이 글은 ‘서해교전, 어느 군의관의 소고(小考)’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퍼졌고 많은 이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줬다.
이 교수는 서해교전을 계기로 군과 안보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매년 6월이 되면 빗발치는 적탄을 무릅쓰고 결사항전을 하는 젊은 영웅들의 꿈을 꾼다고 말했다.
춘천=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