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6월 7일 오전 이탈리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 무솔리니 총리가 사절단을 이끌고 바티칸으로 들어서자 몰려 있던 군중은 환호했다.
무솔리니는 곧장 가스파리 추기경을 만나 라테란 조약 비준서를 교환했다. 바티칸시티가 독립국가인 바티칸 시국(市國)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미국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
‘비준서가 교환되자 교황청의 스위스 근위대는 이탈리아로부터 넘겨받은 영토를 향해 행진했다. 굳게 닫혀 있었던 바티칸의 한쪽 성문도 활짝 열렸다.’
바티칸의 한쪽 성문은 이탈리아 왕국이 로마를 강제로 합병하고 교황권을 박탈한 1870년부터 굳게 닫혀 있었다. 이른바 ‘로마문제’의 시작이었다. 세속적 국가인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와 신의 지배를 받는 교황령(領)의 정신적 수도 ‘로마’의 충돌이었다.
라테란 궁전에서 양측이 조약에 서명한 것은 이보다 4개월 앞선 2월 11일. 교황청은 이탈리아를 국가로 승인하고, 이탈리아는 바티칸시티에 대한 교황의 절대적 주권과 독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으로 60년에 걸친 ‘로마문제’는 해결됐다. 교황청의 정치적 지원이 필요한 무솔리니 정권과 세계 가톨릭교회의 상징으로서 신권(神權)을 회복해야 할 교황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이탈리아는 하느님에게 돌아왔고, 하느님도 이탈리아에 돌아왔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월드 팩트북’은 바티칸 시국을 이렇게 소개한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 면적은 0.44km². 국경 길이는 3.2km. 인구는 821명으로 추정.’ 국가로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수치들이다.
그러나 바티칸은 작고, 적기에 더 위대하다.
바티칸의 영향력은 2005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했을 때도 증명됐다. 교황의 시신을 알현하기 위해 찾아온 조문객만 400만 명. 로마 인구 300만 명보다 많았다.
당시 발터 카스퍼 독일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티칸이 세계 11억 가톨릭 신자의 ‘정신적 수도’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는 기적이다. 모든 길은 로마가 아닌 바티칸으로 통했다.”
비록 로마에 둘러싸여 있지만 로마 위에 군림한다는 바티칸의 자존심이 읽힌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