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알처럼 품는, 그의 한옥은 그대로 자연이 된다
내 조카들은 미남 가수 비의 공연을 보며 까무러치고 아들 녀석은 칸의 주인공인 전도연에게 열광합니다. 빼어난 스타의 존재는 풍요의 한 모습입니다. 나도 열성 팬이 되어 공연장에서 함께 까무러치고 밤새워 그녀의 모든 필름을 보는 성의를 보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저씨의 남세스러운 호들갑을 반기지 않을 듯합니다.
내게도 좋아하는 스타가 있었습니다. 전설의 여가수 마리아 칼라스와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메르가 그 주인공입니다. 열심히 LP판을 모아 귀기 어린 소프라노의 노래를 밤새워 듣고 또 들었고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피렌체까지 찾아가 노(老)아티스트를 만났던 극성은 당연합니다.
이제 그들은 내게 스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심의 열정이 식었다고나 할까요. 그 자리를 대치하는 스타는 바로 목수 신영훈입니다. 사람들을 열광시킨 적도, 끌어 모으는 흡인력도 없는 선생님의 빛나는 성과 때문입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남대문이나 경복궁 주변을 서성거리거나 충북 진천군 보탑사를 찾아 선생님의 손길과 업적의 의미를 되새겨 보곤 합니다. 앞으로만 달려가면 바라는 것을 얻을지 모른다는 시대의 집단 최면을 수정하고 싶으셨는지요? 선생님의 희망 한 자락은 공허하지 않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성과에 열광하는 나 같은 사람이 꽤 늘어난 까닭입니다.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오래전 선생님을 딱 한 번 뵌 적 있습니다. 일본 나라(奈良)의 호류(法隆)사 5층탑 앞에서입니다. 함께한 답사여행의 본전을 뽑으려 던진 귀찮은 질문을 다 받아주시더군요. 느릿한 말투로 우리 건축의 원형임을 설명해 주셨고 목탑 복원 의지를 다지셨습니다.
전공자도 아닌 주제에 경주 황룡사9층목탑의 존재를 상상으로 조립해 보곤 합니다. 주춧돌 위에 나무 기둥만을 세워 높이 80여 m에 달하는 거대한 건물을 세운 신라. 현대의 건축법으로도 쉽지 않은 불가사의한 목탑의 존재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가슴 뿌듯합니다. 1400여 년 전 사람들의 웅대한 스케일과 능력은 세계의 첨단이라 자처해도 좋겠지요. 반도의 남쪽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의 역량은 오늘날 핵폭탄을 가진 것만큼의 위세라 할 만합니다.
선생님은 직접 그 시대의 영화를 재현하고 싶으셨을 겁니다. 넘치는 시대에 외려 빈약한 이 나라의 나약함을 꾸짖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일개 목수의 기개보다 못한 정치인의 안목과 구역질나는 행태를 비웃고 계신다는 걸 난 압니다. 질타와 비웃음이 전부라면 선생님은 별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선생님은 꿈을 현실로 바꾼 영웅입니다.
1992년 드디어 선생님께서 목탑을 짓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기만입니다. 800년가량의 공백을 잇기 위해 말을 아끼며 준비해 두었던 목탑의 설계를 풀어놓았고 장인들을 끌어 모아 결국 ‘사고’를 치셨습니다. 핏기 없는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는 말에 ‘역시 신영훈!’을 연발하게 되더군요.
목탑 짓는 4년 동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관찰자가 되어 수시로 현장 상황을 체크하고 형태가 갖추어지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경비를 써 가며 진천에 찾아가는 일은 즐거운 놀이보다 신났습니다. 톱으로 나무를 켜고 자귀로 다듬는 목수의 신명나는 콧노래를 여전히 기억합니다.
그 큰 건물을 못 하나 쓰지 않고 지으셨더군요. 가리고 따지기 좋아하는 현대 건축의 이론대로라면 곧 넘어져야 마땅합니다. 이 땅의 건물들이 그렇게 수백 년을 버텨 온 이유를 잘 아는 선생님의 확신이 아니라면 불가능하겠지요. 오래전 성취를 경험했던 우리 문화의 승리입니다.
그보다 놀라운 일은 그 안에서 사람이 산다는 사실입니다. 꿈의 공간은 모든 사람을 위한 거처이자 안식의 장소로 꾸며져 있더군요. 높게 터진 3층 건물 내부는 하늘과 만나며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이상을 표현한 듯합니다. 부처의 원력을 담아 세상과 공존하려 했던 신라인의 바람처럼 말이지요.
각 방을 찾아 앉아 보고 걸어 보며 우리 건축의 기품과 격조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확인했습니다. 인간을 위한 건축은 기가 통하고 온기를 느껴야 제격입니다. 과거에 얽매여 죽어 있는 전통과 형식을 고집하지 않은 선생님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이쯤에서 존경의 공유지점은 넓게 퍼져 나갈 듯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 건축의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전국에 흩어진 고옥들을 찾아보며 기둥과 서까래, 추녀의 선을 꼼꼼하게 바라봅니다. 일본과 중국의 옛 건축들도 보았습니다. 비교를 통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존재 방식과 세상을 보는 눈의 차이를 실감합니다. 이제 우리의 집이 갖는 아름다움을 자부와 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외국 친구들이 오면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양동마을로 데리고 가 한옥의 정취를 느껴보게 하는 이유입니다.
이젠 전국 곳곳에 자그마한 살림집도 지으신다면서요. 양평에 지으셨다는 귀틀집과 강화도의 학사재도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자연과 조화된 멋진 한옥의 모습이겠지요. 사람이 살아야 하는 집의 기능과 운치는 선생님의 품격 높은 안목으로 제자리를 찾았을 겁니다. 기회가 되면 저희 집도 한 채 지어 주십시오. 선생님께 드리는 두 번째 귀찮은 부탁입니다.
윤광준 오디오 칼럼니스트·프리랜서 사진작가
■ 신 원장 “허허… 좋은 사람 꼭 만나야죠”
두 사람의 인연은 묘하게 엇갈렸다. 윤광준(사진) 씨가 신영훈(72) 한옥문화원장에 대해 안 것은 1980년대 잡지 ‘마당’의 사진기자를 할 때부터였다. 신 원장과 짝을 이뤄 한옥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던 고 김대벽 선생이 당시 ‘마당’을 자주 드나들며 신 원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다. 윤 씨 역시 한국 고건축에 대한 개인적 관심으로 틈날 때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옥을 카메라에 담을 때였다. 자연스럽게 만남이 이뤄질 줄 알았는데 계속 엇갈리기만 했다.
그러다 1991년 일본에 건너간 한민족역사탐방 행사에 신 원장이 연사 중 한 명으로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윤 씨가 참가 신청을 하면서 첫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 이뤄졌다.
“신 선생이 워낙 과묵하신 분이라 일부러 붙잡고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많이 했는데 해박한 지식으로 막힘없이 설명하시는 모습에 절로 감복하고 말았습니다. 풍부한 지식과,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바로 이 시대를 사는 인간을 위한 건축이 돼야 한다는 독자적 철학에 완전히 매료됐습니다.”
그런 신 원장이 충북 진천군 보탑사 목탑을 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4년간 무려 열대여섯 차례나 현장을 찾는 정열을 쏟았지만 한 번도 신 원장을 만나진 못했다고 했다.
현재 강원 정선군에서 한옥 살림집을 짓고 있는 신 원장은 그런 윤 씨를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허허, 그런 인연이라면 만나서 꼭 회포를 풀어야죠, 사람 사는 게 다 좋은 사람과 만나는 게 아니겠소”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신 원장은 윤 씨의 두 번째 ‘귀찮은 부탁’에 대해서도 “그럼, 들어드려야지”라며 흔쾌히 대답했다.
“집이라는 게 다 자기 몸뚱이에 맞게 지어야 하는 법입니다. 모든 사람은 어머니의 자궁이란 각자의 집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개성도 다 다른 것 아니겠소. 계집이란 우리말이 ‘자기 집을 지고 다니는 사람’이란 뜻임을 헤아린다면 똑같이 생긴 아파트에서 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역시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꼭 만나게 되나 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