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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76년 남아공 ‘소웨토 봉기’

입력 | 2007-06-16 03:01:00


총성이 들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한 소년이 양팔에 무언가를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사진작가 샘 은지마는 본능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몇 시간 뒤 은지마의 사진은 현지 신문인 ‘더 월드’ 1면에 실렸다. 소년이 들고 있었던 것은 헥터 피터슨. 경찰의 총에 맞은 12세 소년이었다. 축 늘어진 피터슨을 안고 있는 소년의 눈에는 분노와 비탄이 서려 있었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격분했다. 그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훗날 ‘소웨토 봉기’로 불린 학생 시위는 1976년 6월 1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인근의 흑인 빈민가 소웨토에서 시작됐다. 1만5000여 명의 흑인 학생들이 자기들에게만 아프리칸스어(Afrikaans)를 쓰도록 강요한 백인 정권에 맞서 거리행진에 나섰다. 이 언어는 17세기 네덜란드계 백인이 이주하면서 전파한 말. 흑인들에게는 ‘차별과 억압의 상징’이었다.

경찰은 학생들에게 해산을 명령했다. 말을 듣지 않자 총을 쏘았다. 피터슨이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동료 학생이 피터슨을 병원으로 옮기는 순간을 포착한 게 은지마의 사진이었다.

사진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백인 정권의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의 폭력성을 고발하면서. 그러나 이 봉기를 시작으로 1976년 한 해 동안 약 700여 명의 흑인 학생과 주민이 숨졌다.

‘소웨토’란 말은 현지어 같지만 사실은 ‘사우스 웨스턴 타운십(South Western Township)의 약자. 겉 다르고 속 달랐던 당시 백인 정권의 인종차별정책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소웨토의 비극은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1991년 아프리카 단결기구(OAU)는 소웨토 학생들이 봉기한 6월 16일을 ‘아프리카 어린이날’로 지정했다.

또한 소웨토는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운동으로 198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와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고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를 배출한 ‘관용과 화해의 발상지’로도 기억되고 있다.

은지마는 지난해 6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학생들이 든 건 플래카드였습니다. 총이 아니었죠. 그러나 경찰은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어요. 첫 총성은 학생들이 돌을 던지기 전에 들렸어요.”

소웨토 봉기, 그 중심에는 은지마의 흑백 사진이 있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