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지역 플랜트 공사 수주를 위해 올해 2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로 떠난 황상호 GS건설 차장의 부인 김경옥 씨(오른쪽)가 가족사진을 보며 남편을 그리고 있다. 김 씨는 열사의 땅에서 ‘건설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 남편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빌었다. 황 차장의 아들 재희 군도 옆에서 아빠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다. 사진=전영한 기자·그래픽=강동영 기자
《1996년 5월경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한 주택가.
8개월 전 남편(45·현 GS건설 중동지사 황상호 차장)을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 현장으로 떠나보낸 김경옥(42) 씨는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는 아들 재희(당시 4세·15)군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신바람이 난 재희는 골목길을 아장아장 열심히 걸었다. 그러다 같은 또래의 아이가 아빠 어깨에 목말을 탄 모습을 보자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엄마,나도 아빠 있지?”
순간 김 씨는 목이 메었다.
“그럼,있고말고. 아빠는 지금 뜨거운 나라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셔.”
얼른 눈물을 훔친 김 씨는 재희를 꼭 안아 준 뒤 목말을 태워 아이스크림 가게까지 갔다.》
18일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을 찾은 기자에게 김 씨는 11년 전 일을 사진을 찍어 놓은 듯 또렷이 떠올리며 일러줬다.
“올해 2월 남편이 다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로 떠나자 그때 기억이 자주 떠오르네요. 남편이 집을 비우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중학교 3학년인 재희도 어릴 적 아빠가 해외에서 돌아올 때 사준 ‘레고’ 장난감을 다시 꺼내 보는 일이 요즘 잦아졌어요.”
1990년 황 차장과 결혼한 김 씨는 해외 건설현장으로 장기 파견근무를 자주 나가는 건설회사 직원을 남편으로 둔 까닭에 보통의 아내와는 사뭇 다른 삶을 살았다.
가족이 헤어져 살아야 하는 이산(離散)의 아픔을 겪어야 했고, 이삿짐을 꾸려 낯선 중동과 서울을 오가기도 했다.
1991년 LG건설(현 GS건설)에 입사한 남편은 결혼 초기 해외영업부에서 일했다. 부서 특성상 술자리가 많았던 데다 직장 선후배 사이에 인기가 많아 툭하면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직원들을 신혼집으로 데려왔다.
“술상을 차려 주고 직원들 와이셔츠와 양말을 빨았죠. 아침에는 콩나물국을 끓여 놓고 ‘여기서 주무신다’고 직원들 집에 일일이 전화로 알린 다음 제 직장으로 출근했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라면 어림도 없겠지만 그땐 그랬어요. 남편을 정말 사랑했나 봐요. 호호∼.”
황 차장은 1995년 2월 일본으로 첫 해외 파견근무를 떠났다. 아들이 한창 재롱을 피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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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배웅하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갈 때 재희가 아빠, 엄마와 함께 놀러 가는 줄 알고 무척 좋아했어요. 하지만 아빠가 손을 흔들며 떠나자 재희는 울며 불며 거의 까무러쳤습니다. 제 가슴에도 구멍이 뻥 뚫린 듯했습니다.”
황 차장은 5개월 뒤인 1995년 7월 귀국했지만 잠시뿐이었다. 두 달 뒤인 같은 해 9월 사우디아라비아의 플랜트 공사 현장으로 다시 장기 파견근무를 떠났다.
1년여 동안 다시 헤어져 살다 김 씨와 재희 군은 사우디아라비아로 가서 황 차장과 합류했다. 모처럼 가족이 함께 모여 산다는 게 더 없이 행복했지만 그곳에서의 삶도 간단치는 않았다.
황 차장 가족이 머물렀던 압콰이크(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의 동쪽에 있는 소도시)에는 제대로 된 시장 하나 없을 정도로 편의시설이 열악했다.
낮에도 여성들이 외출하기에는 제약이 많이 따르는 문화인 데다 밤이 되면 인적이 완전히 끊길 정도로 적막한 분위기에서 2년을 살았다.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이었다.
“남편은 틈만 나면 저와 재희를 차에 태우고 이곳저곳 구경을 시켜 줬어요. 낮에 집 안에 갇힌 채 하루에도 몇 번씩 이슬람교 사원에서 울려 퍼지는 기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우울증에 걸린다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바람을 쏘여준 거죠.”
1998년 말 귀국한 황 차장 가족은 1년여를 서울에서 함께 보냈으나 2000년 4월 황 차장이 두바이로 파견근무를 떠나면서 또 헤어졌다. 이듬해 1월 김 씨와 재희 군이 두바이에 합류할 때까지 9개월간 또 이산가족이 됐다.
황 차장이 2002년 12월 두바이에서 귀국한 뒤 4년여 동안 김 씨는 결혼한 이후 한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 남편, 아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파견 명령이 떨어져 황 차장은 올해 2월 다시 두바이로 갔다. 두바이 카타르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지역의 플랜트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한약부터 지었습니다. 남편은 원래부터 보약을 먹기 싫어했지만 강제로 먹였죠. 섭씨 50도 가까이 올라가는 중동에서 제대로 된 밥도 못 챙겨 먹고 몇 년을 버텨야 하니까요.”
인터뷰가 끝날 즈음 “남편이 ‘오일 머니’를 벌어오는 첨병(尖兵)이자 중동에 ‘건설 한국’의 위상을 심는 선구자인데 자랑스럽지 않으냐”고 물었다.
해외 여행과 유학 비용으로 지난해 우리 국민이 해외에서 쓴 돈이 182억 달러에 이르지만 국내 건설업체는 작년에 해외 건설현장에서 165억 달러를 수주했다. 올해는 이 금액이 18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묵묵히 일하는 한국의 건설 역군들이 이 나라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김 씨는 “그런 거창한 말은 잘 모르지만 열사(熱砂)의 나라에서 땀 흘리는 남편의 노력이 헛되지 않고 좋은 결실을 봤으면 하는 바람은 간절합니다”라며 손을 모았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사랑하는 아들 재희에게
며칠 전 재희가 전화했을 때 아빠가 일 때문에 길게 통화하지 못해 참 아쉬웠다. 해외 근무가 잦아 평소에 아빠 노릇도 잘 못했는데 아들 전화까지 제대로 못 받았구나. 미안하다. 재희야.
지금 두바이는 밤 11시가 가까워오고 있단다. 서울은 아침 5시가 돼 가고 있겠지?
재희는 아직 깊이 잠들어 있겠네. 한 시간만 지나면 단잠에서 깨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해야겠구나.
아빠도 그랬지만 중고교생 시절만큼 잠이 많이 오던 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잠은 쏟아지는데 해야 할 공부는 왜 그리도 많은지.
잠뿐이 아닐 거야. 어른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지만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놀고 싶지. 책을 펴면 다른 생각이 많이 날 테고. 자꾸만 여자 아이들에게 마음이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할 거야.
그런데도 선생님과 엄마는 “공부 안 하면 인생 종 친다”며 계속 공부를 하라고 채근하시지.
돌이켜보면 아빠도 중고교생 때 그런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때는 별로 가슴에 안 와 닿았어. 그래서 아빠는 공감할 수 없는 걸 억지로 느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고 말해 주고 싶어.
단 “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부모님과 선생님이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란 정도만 알아주어도 훌륭하다고 봐.
아빠가 바라는 건 재희가 건강하고, 이 다음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돼 달라는 거야.
학교 공부 때문에 바쁘겠지만 꼭 시간을 내서 교과서 외에 다른 책을 많이 읽었으면 해. 재희의 마음이 훨씬 풍요로워질 거야.
요즘 이곳은 무척 덥지만 7월 말 서울로 휴가를 떠날 생각 에 하루하루가 즐겁단다. 아빠가 서울에 가면 엄마와 함께 여행을 떠나자꾸나.
2007년 6월 14일 두바이에서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