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어느 추운 날, 최광 안종범 나성린 윤건영 교수 등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이 속속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모여들었다. ‘국민연금 개혁’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 시위엔 연금개혁 필요성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던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금담당 박사도 참여했다. 하지만 최근 KDI 직원들은 그동안 들어 온 국민연금을 버리고 사학연금으로 갈아타는 코미디 같은 일을 벌였다. 그런데 KDI가 국민연금을 버린 이면에는 숨겨진 블랙코미디가 몇 개 더 있다.
주목할 것은 KDI 직원들이 ‘부실 국민연금’을 버리고 ‘충실한 사학연금’으로 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은 정반대다. KDI가 연금 갈아타기를 한 것은 ‘받을 연금액이 내는 보험료의 몇 배인가’를 나타내는 수익비가 사학연금은 3.7로 국민연금(2.2)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학연금의 재정 고갈은 2026년으로 국민연금보다 21년 빨리 온다. KDI 사람들은 입으로는 연금재정 안정화를 주장하면서도 눈앞의 단맛에 이끌려 더 위태로운 난파선으로 옮겨 탄 셈이다.
국민연금은 덜 내고 많이 받는 구조 때문에 매일 800억 원씩 적자가 커지고 있다. 4년 전 여의도 연금 시위에 참석했던 KDI 박사는 이를 두고 “현 세대가 타 먹은 연금을 자식 세대가 갚도록 하는 ‘선배 세대의 도적질’”이라고 표현했다. 사학연금은 도적질의 강도(强度)가 더 심해 차세대 KDI 직원들은 정말 쪽박을 차게 된다. KDI 박사들이 후배 박사들을 대상으로 섬뜩한 착취를 시도한 셈이다. 게다가 사학연금은 국민연금과 달리 기금이 고갈되면 국고 보조도 못 받는다. 그래서 “30년 뒤에는 KDI 직원들이 머리띠를 매고 연금 돌려 달라는 시위를 할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더 무서운 시나리오도 있다. KDI는 국내 최고의 수재들이 모여 있는 싱크탱크다. 사학연금의 미래가 어떨지 모를 리 없다. 공무원연금이나 군인연금의 경우 재원이 고갈되자 국고보조가 시작됐다. 사학연금이 고갈되는 경우에도 정부가 그냥 방치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생각해 보라. 공무원연금에 가입한 공립학교 교사들은 국고보조로 연금을 받는데 사학연금에 가입한 사립학교 교사들은 연금이 끊어지는 상황이 쉬 벌어지겠는가? 사립학교 교사들의 ‘가열찬 투쟁’으로 사학연금에도 국고가 지원되도록 법이 바뀌면 KDI 직원들은 무임승차하게 된다. 기자의 생각에는 KDI 박사들이 이런 ‘못된 계산’을 못 했을 리 없다.
KDI가 어떤 계산을 했건 연금 개혁 주장은 옳다. 지금 국회에 계류돼 있는 국민연금개혁법안은 세대 간 도적질을 그만두자는 것도 아니다. 기금 고갈 시한을 2047년에서 2061년으로 늦추도록 도적질을 좀 완화하자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조차 법안 통과 전망이 불투명하다. 외국에서도 연금 개혁은 대개 정권을 내놓을 각오를 하고 시작한다. 실제로 개혁에 손을 대면 정권을 내놓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웨덴 스위스가 그랬다. 그런데 개혁을 미룰수록 연금 기득권을 놓아야 할 사람이 많아진다. 저항세력이 커지면서 개혁은 더 힘들어지는 것이다.
복잡한 얘기 같지만 결론은 간명하다. 국민연금이든 사학연금이든 하루라도 빨리 개혁해야 한다. KDI 꼴을 다시 안 보려면….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