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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내 지친 몸을 맡겨 쉬고 싶은 그곳 ‘간이역’

입력 | 2007-06-22 02:58:00


《그럴 때가 있다. 주위의 모든 게 답답한.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기 싫은 날이 있다.

상처 탓일 수도, 외로워서 그럴 수도 있다. 딱히 이유가 없을 때도 있다. 사랑이 변하는 데 이유가 없듯이. 창문도 없는데 찬 바람이 몰아치는 마음. 굳이 웃어 봐야 생채기만 시릴 뿐이다. 그럴 땐 훌쩍 떠나고 싶다. ‘스스로에게 자신을 끌고 가는 또 하나의 고행’(알베르 카뮈)일지라도.

말이 필요 없는 동반자 한 명이면 족하다. 혼자도 나쁘지 않다. 고즈넉함이 먼지처럼 켜켜이 쌓인 곳. 인생에는 없어도 철길 위엔 있는 간이역이 제격이다. 하루면 충분하니 많은 짐도 필요 없다.

카메라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 “오월의 내 사랑이 숨쉬는 곳….”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를 귀에 꽂을 플레이어만 있으면 된다. 덜컹대는 열차에 몸을 싣고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나자.

아무 것도 없기에, 우리가 찾는 모든 것이 가득한 간이역으로 떠났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죽는 날까지 긴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레일 위를 달리는 인생 열차에

내 삶을 맡기고 세월 속을 달리다,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간이역이 있다면

- 조사익의 '인생 열차에는 간이역이 없다' 중에서

▼ 사라져가는 ‘추억의 명소’ 간이역을 찾아서▼

○초여름, 가을햇살 속으로 떠나는 여행

금요일 오전. 날씨는 맑은데 서울 하늘은 뿌옇다. 벌써 후덥지근한 공기. 여름을 날 생각을 하니 아득해진다.

1시간 정도 걸려 팔당역에 닿았다. 경기 남양주시의 팔당댐 옆이다. 겨우 서울 거리를 벗어났는데 하늘이 해맑다. 따가운 햇살만 아니라면 영락없는 가을 하늘이다.

팔당(八堂)은 예전부터 인가가 드문 지역. 우뚝한 예봉산 끝자락 아래 한강 턱에 팔당역이 자리 잡았다.

유원지가 폐쇄된 이후로 승객은 거의 없다. 역무원은 “일주일에 한 명 타거나 내리면 많은 편”이라고 했다. 입구를 감싼 소담스러운 담쟁이덩굴만이 발길 끊긴 플랫폼을 지키고 섰다.

역사는 국내에선 보기 드물게 철로 사이 승강장에 있다. 일자형 장방형 역사로 문화재로도 가치가 높다. 내부는 바뀌었지만 전체 구조물은 1939년 건립 당시의 모습을 대체로 유지했다.

화물차를 제외하면 통일호 열차만이 하루에 세 차례 정차한다. 역무원이 깃발을 휘젓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최동섭 역무과장은 “열차 운행은 중앙본부에서 직접 관리한 지 오래”라며 웃었다. 기차가 들어서며 하얀 고리를 던지던 풍경도 과거의 일이다.

역은 한적해도 인근은 붐비는 편. 별미 매운탕 집이 많이 들어서 있다. 최 과장이 추천한 ‘횡성 한우’ 집도 맛집으로 소문난 곳. 주인은 뒷마당에서 기른다는 채소 자랑에 열을 올렸다. “저녁 때 돌아오는 내 취한 모습도 좋겠네.” 김현철의 노랫가락을 또 한번 흥얼거렸다.

○ 햇살이라도 멈춰 주려마… 절대고요의 시간

찾기도 힘들었다. 엉성한 골목 한 귀퉁이를 지나야 역이 보인다. 그나마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2228번 버스가 서는 게 다행이었다. 녹이 슨 안내판은 읽을 수도 없다.

남양주시 조안면의 능내역은 얼마 전부터 ‘무정차 통과역’이 됐다. 사람들이 들고 나는 간이역 역할을 잃어버린 곳. 올해 6월 1일 추억 속으로 사라진 59개 간이역 가운데 하나다.

주민들의 아쉬움은 컸다. 능내역은 다산 유적지와 밤나무숲 강변 산책로가 가까워 제법 관광객이 많았던 곳. 찾는 발길이 끊길까 걱정하면서도 “레일 바이크 관광지로 개발한다던데 아느냐”며 기대를 드러냈다.

상주하는 역무원이 없는 건 꽤 됐다. ‘2005년 4월 1일부터 무인역’이란 안내글귀가 역문을 잠근 시커먼 자물쇠를 처량히 달랜다. 역 마당의 화단도 손길 끊긴 흔적이 역력했다.

적막함을 기대했다면 능내역은 ‘바로 그곳’이다. 새소리 벌레소리가 잦아드니 햇빛소리라도 들릴 듯. 푸르르 보슬비라도 내리면 처마는 눈물마저 흘릴 태세다. 쭉 뻗은 철길만이 ‘찰칵’ 카메라를 유혹한다. 잠깐 역사 벽에 기대어 그늘에서 땀을 훔쳤다. 아래를 내려보니 개미들이 분주하다. 열기를 피해 줄행랑이라도 놓는 건지.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흙 장난치던 시절. 그때만큼이나 능내역은 아련한 햇살에 젖어있었다.

○ 푸르른 철길 위에 털어버린 고민 한 줌

싱그럽다. 모내기가 끝난 논밭과 아름드리 우렁찬 느티나무. 언덕에 올라선 구둔역은 왠지 모를 생기가 묻어났다. 지평과 양동을 잇는 구둔역은 간이역치고는 정차가 잦다. 무궁화호가 상행 3회, 하행 3회 등 모두 6회 운행 중이다.

경기 양평군 지제면의 구둔역은 지역 학생들에겐 여전히 소중한 존재다. 아침저녁으로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이 열차로 통학한다. 열차를 놓쳤다간 몇 십 km를 돌아가야 한다.

사진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던 나이 지긋한 역무원. “멀리 서울에서 왔다니, 거참. 이번 한번뿐이여.” 혀를 차는 모습에 촌로의 속정이 엿보인다. 슬쩍 말을 붙이니 설명도 구수하다.

“이래 봬도 구둔역이 철도공사가 뽑은 ‘아름다운 역’이요. 60년이 넘었지만 건물도 성하고. 앞뜰 나무들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을 걸. 철길 너머 언덕배기에서 내려보면 그림이 따로 없소.”

때마침 들리는 열차의 기적소리. 지나칠 줄 알았더니 슬쩍 멈춰선다. 기지개를 펴며 플랫폼에 내려 담배를 빼어 무는 기관사. “단선이라 반대편 열차가 오면 잠깐 비켜섭니다. 경부선 같은 데선 볼 수 없는 풍경이죠. 덕분에 허리 한 번 펴는 겁니다, 허허.”

열차가 지나간 자리. 다시 역사가 눈에 들어온다. 오랜 손길이 뱄을 연못과 텃밭에 시선이 머문다. 물길 따라 헤엄치는 붕어의 유유자적, 세차게 입을 벌린 푸성귀의 산뜻함이란. 지지배배 옹골찬 산새소리가 또다시 고요함을 깨뜨린다. 삶의 고민 그까짓 거, 훌훌 털어버리란 듯이.

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 철도공사 추천… 가볼만한 간이역 11곳▼

《간이역의 멋은 뭐니뭐니 해도 고즈넉함이다. 열차도 사람도 드물기에 간이역이기에.

하지만 어떤 간이역은 은근한 입소문에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이나 사진 동호회 회원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분위기가 색다르고 주변 풍광도 아름다운 전국의 간이역 명소를 살펴봤다.》

① 화랑대역 서울 노원구 공릉2동. 육군사관학교와 가깝다. 역명은 신라시대 화랑이 이 지역에서 학문과 심신을 닦았다는 연유로 지어졌다. 부근에 태릉선수촌, 올림픽사격장, 푸른동산, 육사박물관 및 기념관 등이 있다. 특히 육사 개방 이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02-978-7788 동아일보 자료사진

② 신탄리역 1913년 7월 10일 경기 연천군 신서면에 세워진 역. 1971년 철도 중단점 표지판을 설치한 경원선 최북단역. 휴전선과 4km 정도 떨어져 실향민들이 자주 찾는다. 고대산 등산객도 이용한다. 031-834-8887

③ 김유정역 강원 춘천시 신동면 소재. 원래 ‘신남역’이었는데 김유정 작가의 생가가 가까워 2004년 전국 최초로 인명이 역 이름으로 등장했다. 김유정 문학촌 외에 삼포유원지, 팔봉산 국민관광지, 대명리조트 등이 있다. 033-261-7780

④ 임피역 1930년대 군산선 철도역사로 건립된 건물. 옛 모습이 잘 유지돼 드라마 촬영지로 자주 이용된다. 오솔길 같은 느낌의 철길도 운치 있다. 농촌지역 소규모 간이역의 전형적인 건축 형식과 기법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전북 군산시 임피면.

⑤ 간현역 맑은 섬강을 중심으로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간현 국민관광지엔 여름철 피서객도 많다. 붉은색 벽돌에 녹색 지붕을 올린 역사가 인상적. 대학생 MT가 많은 가을철이면 은행나무 단풍도 멋스럽다. 강원 원주시 지정면. 033-731-7783

⑥ 일산역 일제 강점기인 1933년 준공된 간이역. 신도시 한가운데 당시의 역사가 남았다는 것 자체가 희소가치를 지닌다. 일자형 평면 위에 십자형 박공지붕을 올린 형태는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다.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2동 소재. 031-976-7788

⑦ 연천역 신탄리역과 마찬가지로 6·25전쟁 이후 탈환한 역. 현재는 군 화물 취급이 많다. 인근 연천역사공원은 산책하기 좋거니와 전쟁 당시의 생생함도 살아있다. 증기기관차 시절 세워진 사각형 급수탑엔 탄흔도 남아있다. 경기 연천군 연천읍. 031-834-0778

⑧ 심천역 충북 영동군 심천면. 옛 지명인 ‘지프내(깊은 내)’에서 심천이란 이름이 나왔다. 앞으론 편안한 산마루가, 뒤로는 금강 상류인 버들내가 솔내와 합쳐지는 강이 자리 잡았다. 주위에서 고인돌 등 선사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043-742-5717

⑨ 율촌역 말 그대로 ‘밤나무 마을(栗村)’에 있는 역. 1930년 12월 25일 전라선 개통과 동시에 세워졌다. 전국적으로 몇 안 되는 목조 역사. 인근 갯벌의 굴 꼬막이 유명하다. 향후 율촌 공단이 조성될 계획. 전남 여수시 율촌면. 061-682-7427

⑩ 청소역 충남 보령시 청소면. 전형적인 시골 간이역 풍경을 지녔다. 가을이면 억새풀이 유명한 오서산과 회무침이 별미인 오천항이 가깝다. 이름 그대로 푸르름(靑所)을 간직한 역. 041-931-2788

⑪ 송정역 송정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부산 해운대구 송정동에 있다. 1940년대의 역사 건축양식이 잘 보존돼 건축사적 가치도 있다. 우측 지붕에 얹어진 경사 완만한 박공지붕과 목재로 처리된 차양지붕의 처마는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051-703-7788

장소 추천·사진 제공=한국철도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