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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따라 세계일주]쿠바의 소도시 마탄사스

입력 | 2007-06-22 02:58:00

쿠바 아바나 인근의 소도시 마탄사스에서 본 거리 공연. 사진 제공 유경숙


《한 남자가 쿠바에 놀러왔다. 예상외로 휘황찬란한 아바나가 만족스러웠던 그는 고국으로 돌아간 위에도 아바나를 못 잊어 쿠바 망명을 결심했다. 한 달 뒤 쿠바를 다시 찾았을 때, 남자는 깜짝 놀랐다. 천국 같던 쿠바는 온데간데없고, 혐오스러운 뱀과 불구덩이, 거지와 약탈자들뿐이었으니까.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이 남자가 “한 달 전과 너무 다르지 않으냐”고 따지자 옆에 있던 쿠바 사람이 이렇게 대꾸하더란다. “그때 넌 관광 비자였잖아∼.” 쿠바 사람들이 들려준 농담이다. 꼭 이 농담 때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관광객들이 득실대는 아바나를 비켜 조금이라도 더 쿠바의 ‘맨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을 가고 싶었다. 알다시피 공산국가인 쿠바에서는 모든 것이 배급된다. 빵은 1인당 하루 2개, 달걀은 월 5개. 모든 것이 무료 또는 우리 돈 몇 십 원에 배급되는 이 나라에서 관광객용이 아닌 일반인들이 즐기는 문화 공연은 어떤지 궁금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은 아바나 인근의 소도시 마탄사스(Matanzas), 우리나라로 치면 의정부보다 조금 작은 소도시였다.》

○누런 종이에 휘갈겨 쓴 티켓, 에어컨도 없어 후텁지근

도심에 들어서자마자 사우토 극장(Teatro Sauto)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5년 후면 개관 150주년을 맞는다는 이 공연장은 700석 정도 규모였는데 나무와 철근으로 된 낡은 극장이긴 했지만, 측면에 발코니석도 갖추고 있어 꼭 유럽식 오페라극장의 축소판 같았다. 티켓박스는 교도소 면회소처럼 낡고 초라했고, 티켓은 누런 종이에 손으로 대충 써서 주는 게 전부였다. 사람들이 서 있기에 나도 덩달아 여기서 티켓을 샀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이 티켓박스라는 걸 알아볼 아무런 팻말조차 없었다.

극장 입구를 찾다가 멀찍이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극장의 여직원이 보이기에 소리쳐 물어봤다. 그 직원은 검지손가락으로 담배를 때려 불을 끄더니 귀찮다는 듯 아주 느릿느릿 다가왔다. 그런 태도가 어이없기도 했지만 세상이 재미없다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새삼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낡은 공연장과 불친절한 직원의 태도와는 달리 쿠바에서 공연은 의외로 활성화돼 있었고 공연도 괜찮았다. 관객들 역시 진심으로 공연을 즐길 줄 아는 것 같아 보였다.

마침 이 지역 출신이라는 세계적 아프로쿠바(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쿠바음악) 그룹인 로스 무네키토(Los Munequitos)의 공연이 열렸다. 결성 50주년을 맞아서 마탄사스 주로부터 공로패를 받는 것을 기념하는 축하쇼였는데 그룹 멤버들과 맘보, 룸바 댄서들의 이름이 한 명씩 불려지며 인사를 할 때마다 관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짝짝 짝짝짝’ 하며 다섯 번씩 리듬에 맞춰 똑같이 박수를 쳤다. 공연 내내 관객들은 엉덩이를 들썩이고 좌석 팔걸이를 툭툭거리며 출연자들보다 더 흥겹게 춤을 추어 댔다. 에어컨도 없는 후텁지근한 공연장에서 관객들은 프로그램 순서만 달랑 적혀 있는 A4 크기의 종이 한 장을 팔랑팔랑 흔들어 부채질을 하면서도 행복한 표정으로 공연을 즐겼다.

○유명 공연 요금도 250원… 주민들 맘껏 즐기며 삶의 피로 잊어

이 작은 소도시엔 150년 된 공연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매주 토요일 현악4중주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도서관 내의 소극장, 박물관 로비를 활용한 피아노 연주회장, 금, 토, 일요일 밤마다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공연이 올려지는 문화센터…. 어린이용만 전문으로 하는 인형극 전용극장도 2개나 있었다.

가장 큰 극장인 사우토 극장에서 올려지는 일부 유명한 공연들만 5쿠바페소(약 250원) 정도일 뿐 거의 모든 공연이 무료였다.

올해로 7년째를 맞는다는 파파로테 인형극 전용극장에는 주말마다 가족 단위 관객을 위한 공연이 펼쳐진다. 나도 앙증맞은 쿠바 어린이들 틈에 끼어 토요일 낮에 열린 ‘선 긋기(Rayado)’라는 인형극을 봤다. 이런 작은 도시를 찾는 동양인이 드물어서 그런지 아이들은 무대 위 피에로에 깔깔거리면서도 옆에 앉은 나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어린이 공연들 역시 다 무료였다(물론 현지인의 경우만 그렇고 외국인 관광객은 똑같은 공연이라도 20∼100배 비싼 이중 가격제다).

이 인형극장의 총감독이라는 백발의 할아버지는 “쿠바의 모든 공연은 정부 예산을 받아 진행되며 이는 국민들의 문화생활을 위한 것”이라는 모범 답안 같은 답변을 했다. 그래서 “돈도 음식도 나라에서 주는데 여기서는 공연도 ‘배급’이냐”고 하자 “먹는 것과 공연을 비교하긴 어렵지만, 같은 개념이다”라고 설명하더니 서둘러 자리를 떴다.

영어를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었던 나의 쿠바 공연기행은 비록 ‘수박 겉핥기’였을지 몰라도, 모두에게 문화를 누리는 기회가 균등히 주어진다는 점에서 우리 한국의 문화계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이미 높아질 대로 높아진 공연 티켓 값이 일부 마니아나 여유 있는 층에서만 애용됨은 부인할 수 없다. 비록 공연은 허름했지만 이곳에서는 비싼 티켓 가격 때문에 엄마는 로비에 서서 기다리고 아이만 공연장에 홀로 들어가 공연을 보는 진풍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순간, 얼핏 떠오르는 엉뚱한 생각에 웃음이 났다. ‘문화계만이라도 쿠바의 공짜 시스템을 도입하면 어떨까?’

유경숙 공연기획자 prniki1220@hotmail.com

춤과 음악의 도시 아바나

춤과 음악의 도시 아바나를 달리 표현한다면 ‘몸치 클리닉’쯤 되지 않을까?

막대기보다 더 뻣뻣하던 내가 이곳에 온 뒤 거리에서도 거침없이 춤을 출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나뿐 아니라 아바나 거리의 행인들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골목골목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몸을 흔들곤 했다. 춤을 안 추고 그냥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같이 추자고 손짓도 한다.

아바나의 공연은 열 중 아홉은 춤과 음악이다. 카지노라 불리는 살사, 차랑가, 콩가(악기 이름이면서 춤의 한 장르다), 와왕코, 룸바, 차차차, 과관코(Guaguanco), 맘보….매일 밤에 열리는 댄스와 음악 공연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부에나비스타 소설클럽은 쿠바 혁명 이전 음악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이유로 지금도 매일 공연되고 있는데 주요 멤버들이 작고했거나 교체된 탓에 연주는 과거의 명성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오히려 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에 못지않은 실력가들이 많았다. 무명의 숨은 연주가들은 허름한 골목 안 재즈 클럽에서 1∼2페소의 팁을 받으며 연주하는 경우가 많은데, 쿠바 럼주로 만든 ‘쿠바리브레’ 칵테일을 마시며 듣는 맛이 일품이었다. 이런 ‘뮤지카(음악장르)’의 나라인 쿠바에 뮤지컬은 없었다. 뮤지컬이 너무나 미국적인, 자본주의적인 장르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어를 좀 한다는 공연장 안내원들도 ‘뮤지컬’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쿠바를 다녀온 관광객들이 흔히 찬사를 남기곤 했던 ‘트로피카나’ 공연은 개인적으로는 실망스러웠다. 수십 명의 흑인 미녀가 열대 과일과 풀잎(?)으로 만들어진 비키니를 입고 나와 두 시간 동안 쿠바 전통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관광객을 위해 만들어진 쇼였다. 우리나라의 가요무대와 워커힐쇼를 합쳐 놓은 쇼라고 하면 정확하다. 현지인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7만∼9만 원의 가격도 엄청났지만 사진을 찍으려면 우리 돈 5000원을 더 내야 한다. 화려한 ‘트로피카나’의 객석에 앉아 있는 내내 거리에서 만났던 현지인의 충고가 떠올랐다. “아바나는 이미 쿠바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