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뱅 이론과 히틀러를 접목시킨 장편 판타지 소설 ‘빅뱅의 비밀’을 낸 김활 군. 독일에서 태어난 김 군이 재능을 발휘한 데는 이야기 구성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한 부모의 자유방임형 가정교육도 한몫했다. 김재명 기자
《#1 ‘너한테 홀딱 반했어.’ ‘홀딱’이 뭐지?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여학생에게서 받은 편지에 소년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용이 쑥스러워서가 아니었다. ‘홀딱’이 무슨 뜻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뒤 한국의 초등학교로 와서 받아쓰기를 40점 받은 적도 여러 차례. 그동안 책도 열심히 읽어 한국어는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단어가 나왔다. 그것도 또래 친구가 준 쪽지에서….
#2 ‘열세 살 영재 소년이 장편 판타지 소설 완간.’ 최근 여러 신문에서 보도된 기사의 제목이다. 13세 소년이 ‘빅뱅(Big bang)’이라는 우주 탄생의 가상 이론을 소재로 판타지 소설 ‘빅뱅의 비밀’을 쓴 것이다. “빅뱅으로 ‘인피니테시멀 월드’(빅뱅 이전 세계)는 소멸됐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우주가 엄청나게 크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들의 우주가 소멸되면서 생겨날 또 다른 존재들에게는 무한히 작은 우주로 보일지도 모른
다.” 4년 전 ‘홀딱’이라는 말을 몰라 쩔쩔맸던 바로 그 소년이 쓴 소설의 에필로그다.》
독일서 자라 ‘홀딱’이란 말도 몰랐던 아이가 판타지 작가로
문어체식 말투 독특… 놀이할 때도 ‘다른 규칙’ 찾으려 노력
그 소년은 경기 시흥시 은행중 1년에 다니고 있는 김활 군이다. 김 군은 ‘빅뱅의 비밀’에서 ‘빅뱅’ 이전 세계의 악마가 부활을 위해 히틀러의 몸에 들어간다는 설정 아래 이를 막으려는 12세의 ‘하리’와 빅뱅 이전 세계의 영웅 ‘트라켄’의 활약을 ‘크로스 커팅(교차 편집)’ 기법으로 그려냈다.
소설에는 ‘빅뱅’ 이론, 블랙홀, 히틀러 등 과학, 우주, 역사 전반에 대한 지식들이 밀도 있게 녹아 있다. ‘이 소설이 정말 13세 소년의 머리에서 나온 글이냐’는 반응도 무리가 아니지만 작품에는 김 군의 빼어난 과학 지식이 뒷받침돼 있다. 김 군은 과학탐구나 과학전람회 경진대회 등에서 여러 차례 상을 타면서 재능을 보여 줬다.
그러나 김 군의 부모는 “활이는 천재가 아니다”고 단언한다. 어머니 김미숙(43) 씨는 “활이는 세 살 때 천자문을 외우지도, 수학 공식을 풀어 내지도 못했다. 그저 친구들과 잘 노는 평범한 아이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학교 성적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함께 다닌 권광훈(13) 군도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만 해도 활이가 남다른 재능이 있는 줄 몰랐고 그냥 재미있는 친구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야기 자동판매기’라 불린 소년
김 군은 부모가 유학 중이던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둘 다 공부를 해야 했기에 김 군을 유치원에 보냈다. 부모의 걱정이 컸지만 유치원에서 김 군은 인기‘짱’으로 통했다. 친구들이 김 군에게 붙인 별명은 ‘게시테 아우토마트(Geschichte Automat·이야기 자동판매기)’.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김 군의 이야기보따리에 아이들이 주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온 사촌누나들도 여행 중 처음 보는 이국의 풍경보다 김 군의 이야기에 매료됐을 정도다. 김 군의 이야기는 허황된 측면도 있었지만 부모는 이처럼 이야기를 구성하는 재능을 적극 장려했다. 아이 방에도 어릿광대의 코, 마법사의 모자, 지팡이, 보물선 등을 갖다놓아 상상력이 최대한 확장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김 군의 방 앞에 텐트가 펼쳐져 있어도, 방 안이 장난감으로 난장판이 되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아이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구상의 흐름을 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의 방을 청소해도 장난감들은 절대 손대지 않았어요. 놓인 장난감들은 시리즈로 이어지는 이야기거든요.”(김미숙 씨)
어머니에 따르면 김 군은 그저 재미를 위해 ‘레고’를 조립하고 프라모델을 조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안에는 늘 ‘스토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여러 날 이어지는 “미니시리즈 드라마”였다.
○입과 손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해…
김 군과 이야기하면서 느낀 독특한 점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구어(口語)체가 아니라 문어(文語)체라는 것. 김 군이 존경하는 칠레의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에 대해 묻자 “마투라나는 뇌가 없는 생물도 움직이고 살아가는 것을 보고 생물마다 인식하는 것이 다르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그러니까 사람들도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또래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있잖아요’ ‘저기’ 등 허사는 없었고, 주어와 서술어의 순서가 바뀌는 경우도 없었다.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도 정확했고, 형용사와 부사는 최소한으로 사용했다.
철학을 전공한 아버지 김광식(43·대학강사) 씨는 “소설을 쓸 때도 시간만 주면 계속 써내서 하루 정도면 어지간한 글 한 편이 나온다. 머리의 구상을 손이 못 따라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때 한 선생님은 마치 교수가 강의하듯 한 편의 짜임새를 가진 설명문이 아이로부터 흘러나와 놀랐다는 말을 부모에게 전하기도 했다.
김 군이 이런 재능을 키울 수 있었던 데는 독일에서의 성장 과정이 큰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 김 씨는 “독일에서 활이랑 말을 하면 ‘바룸(Warum·왜)’의 연속이었다”며 “어떤 말을 하든 끊임없이 ‘왜?’라고 묻는 아들에게 설명을 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씨는 “아들의 특별함이라기보다 독일 아이들의 특성”이라고 설명했다. 끊임없이 이유를 묻고 논리를 구성하도록 하는 교육이 독일 사회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또 김 군은 책을 통해 한국어를 익히다 보니 언어의 논리적 구성이 또래보다 탄탄해졌다고 한다.
○‘다른’ 길에 대한 선호
김 군의 또 다른 특징은 가능하면 ‘다른’ 방법을 내놓으려 한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할 때도 한 명이 숨고 여러 명이 술래가 되는 방식 등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내려 했다. 김 군이 쓴 독서 노트에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고 난 뒤 쓴 속편에는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재대결이 펼쳐지는데 무전여행을 조건으로 달았다. 그는 이에 대해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이 싫고 이왕이면 약간 복잡한 것이 좋아 원래의 구성보다 심화된 요소를 장치한다”고 말했다.
김 군은 과학 실험 외에도 단편영화를 제작하고, 줄기세포 등 사회 이슈에 대해 방송 뉴스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천체물리학자를 꿈꾸던 그는 요즘은 건축가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김 군의 부모는 “아이에게 정해진 미래를 강요할 생각은 없으며 단지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을 권하겠다”고 말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 김활 군 부모의 교육법
공부 강요않고 맘껏 뛰놀게
잠들기전엔 꼭 아이와 대화
김활 군 부모의 교육법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와 ‘방임’이다.
김 군의 부모는 아이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알아서 잘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공부를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잘 놀아야 건강한 사고를 한다’는 아버지 김광식 씨의 철학 때문이다.
이 때문에 김 군의 부모는 다른 학부모들에게 은근한 원성을 들어야 했다. ‘활이가 저렇게 놀기만 하니까 주변 친구들까지 분위기를 탄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군 부모의 생각은 확고하다. 어머니 김미숙 씨는 “한국에 와 보니 학교에서 정해준 교과 과정만 집중 심화시키는 것을 보고 다른 가능성이 묻힐까 걱정이 됐다”고 말했다.
그런 부모가 한 가지 지키는 철칙은 ‘아이와 대화하기’ 시간이다. 김 군의 부모는 아이가 어렸을 때 잠들기 전 1시간 정도 동화책을 읽어 줬고 그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는 독일 킨더가르텐(유치원)의 교육법이기도 하다.
아버지 김 씨는 “킨더가르텐은 우리나라처럼 한글이나 영어, 산수 같은 부담스러운 학습이 없다”면서 “다양한 장난감, 동화책, 가면무도회 소품 등 아이들이 마음껏 상상력을 펼치고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아이들의 천국이다”고 설명했다. 마음껏 놀게 하고 그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독일에서 익힌 유일한 교육 자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김 군은 초등학교 5학년 이후부터 전교 1등을 도맡아 했고 각종 경시대회에서 상을 휩쓴 데 이어 학교 추천으로 시흥교육청이 운영하는 영재교육원까지 들어갔다. 부모의 방임 교육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 셈일까.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