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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김창혁]베트남 主席

입력 | 2007-06-26 03:00:00


6·25전쟁이 끝난 뒤 북의 김일성 주석이 다시 ‘남조선 적화통일’ 준비에 나서게 된 직접적 계기는 1965년 박정희 정부의 ‘월남(越南) 파병’이었다. 와다 하루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는 “(당시) 북조선의 최대 관심은 베트남에 ‘호응’해 남조선 혁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고 저서 ‘북조선’(2002년)에 적고 있다.

▷미국과 북베트남의 전쟁은 1975년 호찌민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후 상황은 김일성의 ‘기대’를 저버렸다. 북베트남은 전쟁 승리 직후 이웃 캄보디아를 침공하는 등 한동안 ‘선군(先軍) 정치’로 내달렸다. 그러나 1986년 ‘도이 모이(Doi Moi·쇄신) 정책’을 도입하면서 개혁개방의 신작로를 닦기 시작했다. 한국(1992년) 미국(1995년)과의 국교 정상화, 그리고 2006년 11월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도이 모이’는 세계화로 이어졌다.

▷지난해 베트남의 경제성장률은 8.2%. 올해 외국인 투자 유치액은 지난해의 두 배인 200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응우옌신훙 부총리는 어제 세계경제포럼(WEF) 동아시아 회의에서 “지금 추세대로라면 2020년엔 중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무엇보다 하루 2달러도 못 버는 빈곤층이 2001년 62%에서 지난해엔 36%로 줄었다.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이 “세계화는 다수의 대중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한 그대로다.

▷응우옌민찌엣 베트남 국가주석이 6일간의 역사적인 미국 방문을 그제 마쳤다. 국가주석으로서는 종전 후 첫 방미였다. 양국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의 토대도 마련했다. 미국에 ‘역사상 최초의 패배’를 안겨준 베트남이 지금은 미국을 이용해 다시 국가 성공 신화(神話)를 쓰려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역시 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전쟁을 치른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북은 아직도 ‘미 제국주의’를 외치며 오로지 핵으로 체제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고 있다. 암시장에서 통용되는 달러화 시세로 환산한 북 주민의 임금은 월 1달러 안팎이다.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