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 직후 한국 사회에는 ‘이공계 위기론’이 불어 닥쳤다. 당시 공과대 학장들과 정부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공대 교육 혁신에 나섰다.
산업자원부는 졸업과 동시에 기업 실무에 바로 투입해도 될 정도의 실력을 길러 주는 커리큘럼(교육과정)을 마련한 공대에 인증을 부여하고 기업들도 이 과정을 이수한 학생에 대해 채용 시 우대해 주는 친산업정책인 ‘공학교육인증제’를 1999년 도입했다.
그 후 각 대학은 이 인증을 받기 위해 △실무형 교육 커리큘럼으로의 전환 △전공수업 비중의 확대 △교수-학생 간 피드백 시스템 도입 등 변화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연세대 공과대학 공학교육혁신센터의 조사 결과 공대 교육의 혁신이 아직은 성과를 나타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저조한 성과의 핵심 원인은 기업과 대학 간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산업 수요에 안 맞는 전공 선택
연세대 공학계열 1학년인 김모(19) 군은 내년부터 이수해야 할 전공을 ‘기계과’로 선택했다.
김 군은 “일본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아기 로봇이 만들어졌다고 언론에 나오자 친구들이 향후 ‘로봇 공학’이 뜰 거라고 많이들 얘기해 기계과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실제 김 군과 같이 기업의 수요와 전망에 대한 정확한 정보 없이 전공을 선택하는 학생이 많아 1학년 공대생들은 기계과를 화학공학과에 이어 두 번째로 선호하는 학과로 꼽았다.
그러나 기업에서 일하는 졸업생들은 향후 3년간 전망 있는 학문으로 기계과를 11개 학과 중 9위로 꼽았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기업 현장의 정보가 대학에 잘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시장에서 형성되는 살아 있는 정보가 공과대학에 물 흐르듯이 전달되지 못하고 대학이 아직 상아탑에만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이번 조사 결과, 전공이 결정되지 않은 1학년 공학계열 학부생들은 11개 공대 학과 중 화공, 기계, 건축, 컴퓨터과학, 정보산업, 전기전자공학, 생명공학, 세라믹공학, 도시공학, 금속공학, 토목환경공학 등의 순으로 유망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기업 현장에 있는 졸업생들은 향후 3년간 유망한 산업을 전기전자, 금속, 화공, 정보산업, 도시, 생명, 세라믹, 컴퓨터과학, 기계, 토목 등의 순으로 평가했다.
서울대 공대 김도연 학장은 “대학과 기업 간에 살아 있는 정보의 교환이 아직도 부족하다”며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장기적으로 대학과 산업 간 인력 공급 및 수요가 어긋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공대 교수는 “만족”, 기업 “글쎄”
대학 학습의 성과에 대한 평가에서 기업, 졸업생, 교수, 재학생 각각은 전공지식 14개 항목(산업체의 졸업생 평가와 동일항목) 평가에 있어 인식 차가 현격했다.
‘전공지식’ 항목에서 교수들은 97.4점을 주며 자신들은 ‘잘 가르친다’고 답한 반면 정작 대학이 배출한 인재를 받는 기업은 78.4점을 주고 ‘불만족스럽다’고 답해 19점 차가 났다.
‘현장적용력’에서도 교수들은 대학 학습의 성과에 대해 84점을 줘 산업계가 평가한 76점과 큰 차를 보였다. 자료분석력, 창의력, 도전정신, 문제해결능력 항목도 양측 간에 큰 인식의 차를 보였다.
현장에 있는 공학도들의 평가는 더 낮아 자신들의 ‘현장 적용력’에 대해 63.4점을 주었다. 스스로 배운 것을 잘 적용해 써먹지 못한다는 의미다.
기업과 대학 간의 이런 괴리는 공대 졸업생은 넘쳐 나지만 정작 기업이 원하는 ‘공학도’의 부족 현상은 심화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공학교육혁신센터 한경희 박사는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분야에서 첨단 기술이 개발되고 이로 인해 새로운 조직의 운영 방식이 나오는 등 환경이 급속히 변하고 있다”면서 “대학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체계적인 무관심’에 빠져 소통 부재에 이른 것이라면 문제”라고 지적했다.
○끊임없는 소통과 변화가 해법
이번 조사 결과에 대해 기업과 대학 관계자들은 한목소리로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르다”며 “산업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공학 교육을 혁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전자산업의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최근 들어 10년 전에 비해 오히려 대학이 배출하는 인력의 질적 수준이 저하됐다”면서 “산업의 변화 속도가 빠른 만큼 대학도 기업이 재교육할 필요가 없을 만큼 새로운 실무능력, 새로운 정보를 갖춘 커리큘럼을 짜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세대 공대 김문겸 학장은 “경영학 전공 교수의 공대 교수 채용을 확대하고 최고경영자(CEO)들의 실무 강좌를 개설하는 등 각 대학이 끊임없이 혁신을 꾀하고 있어 조만간 성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공학교육의 ‘섬’ 공대 여학생
공대 여학생들의 문제도 이번 조사에서 드러났다. 공대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에 비해 우수한 성적을 받으면서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학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대에서 여학생은 18%에 불과하다. 하지만 전체 여학생의 26%가 성적 우수자로 평가되는 학점 3.7 이상을 받았다. 반면 남학생은 12%에 불과해 여학생 우수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공대 여학생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학 교육의 핵심인 기계, 장비를 다루는 데 두려움이 커지고 성취동기와 공학 선호도가 떨어졌다.
조사를 진행한 한 박사는 “최근 우수한 여학생들이 공대에 많이 진출하고 있지만 공대 내 소수자인 여학생들이 겪는 특유의 어려움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이번 조사에서 확인됐다”고 지적했다.
최우열 기자 dns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