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역에 내리면 너무나 한적한 풍경에 당황하게 된다. 아파트 몇 채만 덜렁 서 있을 뿐 주변은 온통 고추와 호박, 옥수수 밭이다. 대동 쪽으로 5분쯤 걸어가면 사람 사는 흔적이 보이지만 그것도 몇몇 상가와 주택이 고작이다. 하지만 골목길로 들어서면 ‘진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곳은 본래 마을 한복판을 흐르는 대동천이 자주 범람해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 1910년 대동천이 보수되고 신흥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비로소 부락이 들어섰다. 그래서 그런지 골목이나 상호 등에는 ‘새’라는 말이 많이 들어가 있다.
신흥초와 충남중 사이는 ‘새터마을’, 묘지와 포도밭이 있던 변전소 쪽 마을은 ‘새뜸’이다. 또 대동천 옆 밭이 있었던 곳은 ‘새전’, 그리고 언덕 쪽은 ‘새들’이라 불리고 있다. 신흥동은 1946년에야 바뀐 이름이다.
▽상설시장으로 변한 ‘도깨비 시장’=지하철역에서 5분쯤 걸어가면 신흥1치수교에서 천변을 따라 대동 쪽으로 150m쯤 길게 늘어선 시장이 있다. 본래 오전 6시께 열렸다가 점심 때면 없어진다고 해서 ‘도깨비시장’ 또는 ‘반짝시장’으로 불렸는데 요즘엔 종일 영업을 한다.
언제 생겼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마을 토박이이자 시장번영회장인 신동명(56) 씨는 “내가 과일장사를 한 지 26년 됐고 그 이전에도 있었으니 30년쯤 됐겠지”라고 한다.
시장에는 옥천과 금산 등지에서 버스를 타고 온 아낙들이 풀어놓은 잡곡과 야채가 많다. 물건 값이 도심의 70% 수준으로 동구지역 최대 재래시장이었으나 지금은 마트 출현으로 예전 같지 않다. 김종국(55) 신흥동장은 “그래도 사람 사는 맛이 나는 곳”이라고 자랑한다.
▽정이 살아 숨쉬는 곳=시장 끝에는 요즘 보기 드문 대폿집이 있다. 빨간 페인트 글씨로 투박하게 ‘왕대포, 잔치국수’라고만 씌어 있다.
왕대포 한 사발에 1000원, 잔치국수가 2000원인데 워낙 양이 푸짐해 배 불리 먹고도 남는다.
“돈은 다 줄 테니 막걸리 반만 달라”는 주문에 주인 홍채연(61) 씨는 절반 이상 퍼준다.
그러고도 “꽉 채우지 않았다”며 막걸리 값은 안 받으려 한다. 공짜로 나오는 곶감 절편 안주는 홍 씨가 직접 겨우내 말린 것이다. 042-284-3706
신흥동사무소 옆에 있는 ‘솔밭갈비’ 사장 오정예(51) 씨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여장부다. 장어와 갈비만 20년째 취급했단다. 처음엔 동구 중동과 인근 라이프호텔에서 장사하다가 5년 전 ‘맛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찾아온다’는 신념 하나로 변두리로 옮겼다.
이 집 장어 맛의 포인트는 세 가지. 활어를 직접 잡아 하루 숙성시켜 육질을 연하게 하는 게 첫 번째요, 대가리와 뼈를 8시간 이상 푹 고아 만든 소스가 두 번째, 그리고 양념을 앞뒤로 여섯 번 발라 굽기 전 파를 돌판에 깔아 비릿한 맛과 냄새를 없애는 게 세 번째다. 가격은 1인분에 1만 원. 13가지 밑반찬을 곁들인다. 042-285-1560
▽제2의 ‘신흥’을 꿈꾼다=동장 김 씨는 “신흥동은 학교 이야기를 빼놓으면 시체”란다. 대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명문’ 신흥초교는 1924년 개교했다. 문창, 천동, 대동초교도 이곳에서 갈라져 나왔다. 이 학교 야구부는 6·25전쟁 중인 1951년 창단됐다. 불멸의 역전타자 한대화, 한화의 구대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인구 7000여 명에 불과한 신흥동은 지금 리모델링으로 들떠 있다. 대전시의 주거환경개선사업인 ‘무지개 프로젝트’ 1단계 사업지구로 지정돼 있다. 역 주변의 텃밭도 내년쯤이면 볼 수 없을 듯하다.
이기진 기자 doyo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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