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브로드웨이의 일부를 가질 때까지는 행복할 수 없을 걸세. 단지 작은 일부분이네. 바로 최정상의 부분이라네!”(조지 마이클 코핸)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의 심장부인 타임스스퀘어. 이곳엔 브로드웨이 각 극장의 할인티켓을 판매하는 매표소인 ‘TKTS’가 있다.
세계 공연의 메카인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한편을 보려는 관광객으로 늘 북적대는 이곳에 동상 하나가 서 있다. 바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아버지’ 조지 마이클 코핸(1878∼1942).
코핸은 1878년 로드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제리와 넬리 코핸은 아일랜드계 떠돌이 엔터테이너였다. 그는 이미 열 살 때 부모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기 때문에 학교라곤 거의 다녀보질 못했다. 11세 때부터 부모랑 누나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가무극을 하기 시작했다.
15세가 되던 해 조지는 부모에게 순회공연을 다니는 것에 지쳤으며 브로드웨이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뮤지컬에서 쓰는 노래와 노래 사이를 대사로 연결하는 포맷을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탭댄스를 뮤지컬에 적극 활용해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대표하는 춤의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리틀 자니 존스’(1904년) 등 51개 뮤지컬과 500여 개의 싱글 넘버를 작곡했다.
작곡가, 작사가, 극작가, 프로듀서, 댄서, 배우로서 불가사의한 능력을 선보였던 코핸은 브로드웨이에 뮤지컬 시대를 연 주인공이었다.
“그는 최고의 연기자, 작가, 작곡가, 댄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작가보다도 춤을 잘 추고, 어느 경영자보다도 작곡을 잘하고, 어느 각본가보다 경영을 잘했다. 그것이 바로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배우 윌리엄 콜리어)
코핸의 삶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뮤지컬이었다. 그의 삶은 1942년 영화 ‘양키 두들 댄디’로, 2006년에는 뮤지컬 ‘조지 엠 코핸 투나잇’으로 만들어졌다. 이 뮤지컬은 올해 9월 국내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그는 “인생에서의 커튼콜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처럼 우리는 무대에서 퇴장하는 순간 더는 박수를 누릴 수 없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산다.
당신은 그 소중한 무대 위에서 과연 어떤 배우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내 인생의 주연배우는 바로 나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