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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71년 루이 암스트롱 사망

입력 | 2007-07-06 03:00:00


“They're really saying ‘I love you’(그들은 진심으로 말하네, 널 사랑해라고).” (‘What a wonderful world’ 중에서)

팝스(pops). 친근한 아저씨.

언제나 쾌활했다. 세간의 주목을 즐겼다. 외로운 예술가보단 사랑받는 연예인이길 바랐다. 연주 도중에도 농을 하기 일쑤였다. 동료들은 어릿광대짓을 타박했으나 달변의 ‘satchel mouth(입이 큰 녀석)’는 멈추지 않았다.

‘새치모(satchmo)’ 루이 암스트롱.

어린 시절 ‘뉴올리언스’의 삶은 각박했다. 가난한 창녀의 아들. 아버지도 모른 채 오두막에서 태어났다. 11세에 의붓아비의 총에 손을 댔다 들어간 소년원. 그곳에서 코넷(트럼펫보다 약간 작은 금관악기)을 배운 건 손오공이 여의봉을 쥔 격이었다.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재즈를 연주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루이 암스트롱)

노력도 남달랐다. 미친 듯이 연습했다. 트럼펫을 잘 불고파 칼로 입술까지 찢었다. 새치모는 말솜씨만 일컫는 별명이 아니었다.

뉴올리언스의 피와 가공할 노력. 20대의 루이가 이끈 밴드 ‘핫 파이브’는 재즈계의 신성(新星)이 됐다. 재즈의 전통적 집단연주를 솔로연주 스타일로 변화시켰다. 우연히 악보 없이 흥얼거린 건 ‘스캣 창법’의 효시. 요즘 재즈를 대변하는 즉흥연주 역시 ‘암스트롱 스타일’이었다.

재즈의 자존심은 ‘브릿팝(Brit pop)’ 광풍에도 빛을 발했다. 비틀스가 지배했던 1960년대 미국 음악계. 1963년 환갑도 지난 나이에 ‘Hello, Dolly’로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다.

말년에도 쾌활했으나 병치레가 깊었다. 1971년 7월 6일. 재즈 황제는 잠이 든 채 세상을 떠났다. “재즈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편안한 여행”(시카고 트리뷴)이었다.

새치모의 삶은 재즈 자체였다. 척박한 뉴올리언스의 한이 흥겨운 가락에 묻어났다. 배고픔을 떨치고 대도시로 흘러온 것도 마찬가지. “금주법 시대, 은밀한 뒷골목의 향취는 백인들마저 끌어들였다.”(사이먼 애덤스)

루이와 재즈. 고상한 와인이 아닌, 인생의 영락(榮落)이 담긴 농밀한 버번위스키였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