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처럼, 사자처럼…영혼을 뒤흔드는 환희의 손가락
초등학교 5학년 때던가. 내가 다니던 소읍의 그 학교에 J시에서 전학을 온 창백한 얼굴빛을 한 정희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었다. 그 애는 낯선 존재였다. 흰 얼굴이나 에나멜구두나 붉은 책가방 때문이 아니다. 그 애가 피아노를 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의 담임은 핸드볼 코치였다. 선생님이 풍금을 칠 줄 몰라(나도 안 믿긴다) 음악시간이 없던 우리에게 그 애가 음악시간을 선사했다. 나는 어려서 키가 컸고 키 큰 애들은 저 뒤에 앉았다. 맨 뒤에 앉아 저 앞자리의 그 애를, 풍금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그 애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보곤 했다. 그 애는 어딘가가 아팠으므로 오전수업만 마치고는 집으로 가곤 했다. 교실 유리창가에 서서 그 애가 혼자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끔 지켜보곤 했다. 그 애의 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날도 있었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피아노 소리 때문이었다. 봄에 왔던 그 애는 가을이 지날 무렵에 쓰러져 누군가의 등에 업혀 나간 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J시로 돌아갔다고도 하고 그 애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고도 했으나 어쨌든 그 이후로 그 애를 다시 볼 수가 없었다. 내 귀엔 그 애가 치던 피아노 소리만 남았다.
20대에 들어서면서 내가 피아노를 무척 편애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 도시에 독립적인 방 한 칸도 없으면서 피아노 앞을 지나가다 보면 그걸 갖고 싶은 욕망으로 목을 길게 빼내고 기웃거리고 있는 나를 느꼈다. 어디서든 피아노 소리가 들리면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나를. 가끔은 토큰을 살 돈이 떨어져 여의도에서 집까지 걷기도 하던 그 시절에 돈이 생기면 피아노곡이 담긴 테이프를, 차츰 발전하여 LP판을, 좀 더 발전하여 피아노 연주회를 쫓아다녔다. 아, 한때 내가 섭렵하듯 다니던 그 숱한 음악회들.
피아노 앞의 백건우를 처음 봤을 때의 그 놀라움을 뭐라 할까.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 듯했다. 피아노 소리만 남기고 돌아오지 않았던 그 애가 커튼 뒤로 확실히 물러나는 순간이었다. 아, 피아노는 슬픔이 아니구나. 기쁨이며 환희이며 아름다움이구나. 인간이 피아노 앞에서 저렇게 늠름하고 당당하고 멋질 수가 있구나. 파도처럼, 강풍처럼 내 마음을 휘젓고 다니는 백건우의 손이 이루어 내는 피아노 소리들은 나를 벅찬 감동 속으로 휘몰아 넣었다. 그의 외모는 상냥하고 자상해 보이는데 피아노 앞의 그는 산맥을 질주해 내려오는 사자 같았다. 손으로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다니. 감탄과 함께 뭇 인간의 손에 대한 신뢰가 동시에 싹텄다. 아마도 나는 백건우의 손가락들이 내는 피아노 소리를 들은 다음부터 인간의 신체 중에 손이 가장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또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초겨울에, 배우이며 그의 아내인 윤정희와 함께 약속시간에 약간 늦어 머쓱한 미소를 띤 채 교보문고 2층에 있는 프랑스 식당으로 들어서는 백건우와 마주쳤다. 두 사람은 참 잘 어울렸다. 청춘의 그들을 보았으면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 모르나 피아노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는 그들은 마치 이렇게 아름답게 나이를 먹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둥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이편저편에 앉아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마음이 흐뭇해서 혼자서 자꾸만 웃었다. 배우 윤정희와 영화제 심사를 함께하게 된 인연을 진짜 감사해했다. 그랬으니 그를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만약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배우 윤정희의 남편으로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도 까다로운 예술가로 보였다면 실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윤정희의 남편으로서도 매우 아름다웠다. 기름기 없이 약간 건조한 듯한 얼굴빛엔 온화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 대한 친절한 배려가 과잉이 아니라 진심으로 느껴지는 소탈한 모습이었다. 음식을 참 맛있게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화제가 그가 파리 아파트에서 만들어 내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는 음식을 만드는 걸 아주 즐기며 특별히 음식을 하는 게 아니라 음식을 만드는 게 자연스레 손에 붙은 사람인가 보았다. 자리에 있던 그의 지인들은 하나 둘 그가 만들어 준 음식들을 추억하며 행복해했다. 그냥 듣고만 있어도 모두 그를 사랑하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정작 사랑받는 그만 쑥스러워했다.
어느 순간 나는 그의 손을 보았다. 저 손인가. 저 손이 그리 영혼이 흔들리는 것 같은 피아노 소리를 들려주었던 열정의 손인가. 저 손으로 아내를 위해, 지인들을 위해 요리를 또 그리 멋지게 한단 말인가. 피아노 앞에서의 그가 아닌 소탈한 생활인으로서의 부드러움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자연스럽게 온몸에 배어 있는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나도 행복해졌다. ‘아, 저이는 남에게 행복을 주려고 이 세상에 온 사람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랬다. 그 저녁시간 내내 그로 인해 모두 행복했다. 이후로 나는 그의 연주회에 어쨌든 가 보려고 하며 가 보고 있다. 단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이 세상에 그 같은 사람이 살고 있고 같은 공간에서 한순간을 같이한다는 것만으로 좋다.
눈이 오는 12월에 예술의 전당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를 눈앞에 두고 있는 그는 “죽을 때까지 베토벤만 쳐도 행복할 것 같다”고 했다. 요즘 나를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하는 말이다. 문득 문득 12월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느낀다. 나도 무엇인가를 두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꿈꾸기 때문일 것이다.신경숙 소설가
▼“연주와 글쓰기 같고도 달라요”▼
‘정희’처럼 피아노를 치고 싶었던 소녀는 자라서 소설가가 됐다.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1993년)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신경숙(사진) 씨는 단숨에 1990년대 문학을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널리 알려지게 될 자전소설 ‘외딴 방’을 쓰기 위해 1994년 3월 제주 성산포를 찾은 신 씨. 머물던 호텔 맞은편에 있는 피아노학원을 발견하고는 가슴이 뛴다. “일본풍 적산 가옥이었는데, ‘쇼팽의 집’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는 예쁜 집이었어요. 살짝 들어가 봤지요.” 신 씨는 용기를 내서 등록했고 초등학생들과 어울려 바이엘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두 달쯤 배웠어요. 선생님이 참 정성껏 가르쳐 주셨는데, 결국 ‘정말 못한다’고 하더라고요”라면서 신 씨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머릿속엔 온통 써야 할 소설 생각뿐이었으니 집중하고 몰두해야 할 악기 연습이 잘될 리 만무했다. 그해 겨울 발표한 단편 ‘깊은 숨을 쉴 때마다’는 제주도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기타에 도전해 본 적도 있다. 10여 년 전 소설가 이제하 씨의 작업실에서 지인들이 모여 기타를 배웠는데 “그때도 영 아니었다”고 한다. “내가 피아노나 기타를 쳐 주고 친구들이 노래 부르는 장면을 그려 보곤 했는데 꿈이 좀처럼 이루어지질 않네요”라면서 신 씨는 “소설을 쓰느라 늘 분주하지만 지금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악기 연주와 글쓰기는 손을 쓰는 일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2001년 장편 ‘바이올렛’을 낼 때 육필로 탈고한 것을 마지막으로, 펜으로 작품을 쓰진 않지만 신 씨는 요즘도 ‘수작업’을 하는 게 있다. 여행 도중 ‘자신에게 편지 부치기’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오면 내가 손으로 쓴 편지가 내 앞으로 와 있는데 기분이 묘해요. 나는 돌아왔지만 다른 ‘나’가 여전히 여행을 계속하는 느낌이랄까.”
악기 연주자든 목수든 손으로 뭔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신 씨. “손은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손의 재능을 모르는 게 아닐까요”라면서 웃음 지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