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에 반대한다/에리카 퍼지 지음·노태복 옮김/256쪽·1만5000원·사이언스북스
최근 개고기를 파는 온라인쇼핑몰이 개고기 반대론자들의 잇단 항의에 문을 닫았다. 항의의 요지는 사람의 친구인 애완동물을 먹는 건 잔혹하다는 것.
옴짝달싹하기조차 힘든 닭장에서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히며 키운 닭은 어떨까. 영국에서 수출되는 송아지는 이동 과정에서 몸뚱이를 돌리지 못할 정도로 비좁은 우리에 갇혀 고통에 신음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쇠고기 닭고기를 먹는 게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처럼 끔찍이 사랑하고, 동물 애호론자들이 반려(伴侶) 동물이라고까지 부르는 개와 고양이 역시 한순간 길바닥에 버려지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에선 동물을 의인화한 애니메이션이 사랑받고 한편에선 동물을 기계처럼 실험 도구로 쓴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동물이라고 뭉뚱그려 쓰는 이 개념, 올바른 말일까.
이 책은 육식의 대상, 애완동물, 실험 도구, 의인화된 예술작품으로서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에 처한 동물의 모습과, 이 동물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의 인식을 살핀다. 영국 미들섹스대 인류문화연구소 선임강사인 저자는 이 복잡성을 무시한 채 ‘동물의 삶은 다 같다’고 생각하는 인간 중심적 사고의 모순과 역설을 드러낸다.
1961년 찍은 사진 한 장이 있다. 우주로 갔다가 바다에 떨어진 우주선 캡슐에서 막 나온 침팬지가 환하게 웃으며 사과를 집으려 한다. 침팬지의 웃음은 무사귀환의 징표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다. 액체 산소가 일찍 고갈돼 계획보다 무중력 상태에 오래 있었고 캡슐에서 나오기 전 캡슐에 바닷물이 들어오고 있었으며 임무를 잘못 수행했을 때 벌칙인 전기충격기에 묶여 있었던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빨을 가지런히 내보이는 게 영장류에게 행복을 나타내는 몸짓이 아니라 공격성과 두려움의 몸짓일 수 있다는 것은 잊혀졌다.
인간은 침팬지가 웃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저자는 우리가 동물을 동반자로 표현하면서도 그 이면에선 동물을 철저히 도구나 대상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 경계는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 사이에 있다. 보이는 곳에서 애완동물은 이름을 갖고 사랑받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동물은 익명의 살코기 덩어리나 가죽외투로 남는다. 사람들은 식탁에 올라온 쇠고기가 한때 들판을 돌아다니며 풀을 뜯던 깊은 눈망울의 소였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 소(cow)를 먹지 않고 쇠고기(beef)를 먹는다고 믿는다.
이 차이는 본질적이지 않다. 인간이 규정한 개념의 차이다. 이 인간중심주의적 모순은 극단적 동물 보호론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