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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홍찬식]‘그라운드 제로’

입력 | 2007-07-10 03:00:00


1977년 공연된 연극 ‘아일랜드’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6개월 롱런이라는 당시로선 경이로운 흥행기록을 세웠다. 연출을 맡았던 윤호진(뮤지컬 ‘명성황후’ 제작자) 씨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권 문제를 다룬 생소한 외국 작품인데도 관객이 몰려 극단 측도 깜짝 놀랐다”고 했다. 배우들 대사엔 인권 억압에 대한 강한 풍자가 담겨 있었다. 관객들은 유신정권 말기의 우리 현실을 떠올리며 큰 박수를 보냈고 이심전심으로 민주화를 열망했다. 그리고 2년 뒤 유신체제는 붕괴됐다.

▷연극의 묘미는 역시 풍자에 있다. 권력과 부조리에 날카로운 화살을 날리면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한국의 민주화가 성취된 뒤 오랫동안 풍자극은 사라지고 가벼운 연극이 판을 쳤다. 8일 끝난 연극 ‘그라운드 제로’는 풍자극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29세기 목성의 위성인 ‘가니메데’가 무대이지만 누가 봐도 북한 핵을 풍자했음을 알 수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인류가 이주해 살고 있는 가니메데는 동서로 분단되어 있다. 민족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웨스트 가니메데의 총통은 북한 김정일을 연상시킨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이스트 가니메데의 대통령은 지지율에 목숨을 걸며 시종 포퓰리즘 정책을 편다. ‘다른 것은 다 잘되는데 경제 문제만 안 풀린다’는 웨스트는 핵 개발을 위해 이스트의 돈을 뜯어낸다. 결국 핵무기가 터지면서 나라 전체가 ‘그라운드 제로(핵폭발로 생명체가 사라진 땅)’가 된다.

▷연극을 만든 사람은 좌파 성향이 강한 문화계의 소수파인 우파 쪽에서 활동해 온 소설가 복거일 씨다. 핵에 둔감해진 사회에 핵의 재앙적 위험성을 알리기 위한 작품이다. 그는 문인들이 북한 인권과 핵에 침묵하는 현실을 걱정한다. 한편 극단 ‘세실’은 노무현 대통령을 ‘역사공부에나 몰두하고 인터넷 댓글이나 다는 한가한 대통령’으로 풍자한 연극 ‘정말, 부조리하군’을 다음 달 무대에 올린다. 겨울잠 자던 풍자극이 기지개를 켜는 것을 보면 현 정권이야말로 ‘수구 기득권 세력’이 다 됐다는 얘기가 맞긴 맞는 모양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