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30일은 세계 음악 역사에 기억될 만한 날이 될 것이다. 이날 밤 독일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극장에서는 올해 오페라 페스티벌의 개막 작품으로 진은숙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초연했다.
한국인 오페라 세계 최고 무대에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라인의 황금’ 등이 초연되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수많은 작품이 공연된 뮌헨의 명문 극장에서 한국 작곡가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린 것이다.
이곳에서 동양 음악가의 작품이 공연된 효시인 1972년 윤이상의 ‘심청’ 이후 35년 만에 처음이다. 당시 윤이상의 초빙이 동베를린 간첩사건의 홍역을 치른 직후 다분히 정치적, 음악외적 고려에서 이뤄졌음을 전혀 무시할 수 없다면 순전히 음악적 차원에서 뮌헨의 명문 오페라 전당에 동양인이 입성한 것은 진이 처음이라 해서 좋을 것이다.
게다가 125년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뮌헨의 ‘보수적’인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개막 작품으로 전위적인 현대 오페라를 선정한 것은 초유의 일이라고 진은 귀띔해 주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물론 그 바탕에는 현란한 광채와 음색이 번쩍이는 진의 음향 세계, 그 음악언어를 지적인 작품 구조와 인성(人聲), 자연음도 포함한 섬세한 악기 편성 구사로 표현해 내는 장인(匠人)성, 아니 천재성이 있다. 진은숙은 어린 시절부터 꿈에서 보는 광경, 눈부신 빛과 빛깔의 비전이 자기의 인간적 실존과 예술가로서의 삶을 일관하고 있다고 여러 기회에 고백하곤 한다. 나로선 진이 뮤즈의 ‘강신(降神)’을 체험한 것이란 무속적 해석을 하고픈 것을 가까스로 참아야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공중권을 기피하는 내향적인 천재가 익명성의 껍질을 깨고 나온 데엔 그를 끌어 올려준 어떤 만남이 있어야 한다. 강석희, 죄르지 리게티, 켄트 나가노와의 만남이 곧 그것이다. 강석희는 진을 키운 서울의 은사요, 리게티는 함부르크의 은사, 그리고 나가노는 진을 세계에 알리게 해 준 음악 감독 겸 지휘자이다(미국의 평론가 마크 스웨드는 나가노를 ‘진의 챔피언’, 스위스의 마르코 프라이는 ‘진의 엑스퍼트’라 일컫고 있다).
사실 진은숙의 영광을 한국의 영광이라 생각하고픈 ‘애국주의자’들은 더더욱 일본계 미국인 나가노에게 감사를 빚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음악의 노벨상이라 하는 그라베마이어상(상금 20만 달러)을 안겨 준 진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베를린 심포니와 함께 초연한 지휘자가 나가노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곡을 진에게 위촉한 것도 로스앤젤레스 오페라의 당시 음악 감독 나가노였다.
음악에 감동하고 인파에 놀라
로스앤젤레스 오페라가 재정적 난관으로 ‘앨리스’ 공연을 단념하자 바로 지난해 가을 주빈 메타 후임으로 바이에른 국립극장 감독으로 부임한 나가노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좌절한 ‘앨리스’의 꿈을 뮌헨에서 오페라 페스티벌 개막 작품이란 더욱 성대한 이벤트로 실현해 놓은 것이다. 진에게는 이번엔 행운의 여신이 강신했다고나 할까.
공연은 대성공이란 것이 언론의 중평이다. 나는 개막 3일 전의 ‘드레스 리허설’(총연습) 날 극장 주위에 수많은 팬이 ‘표를 구함’이란 쪽지를 들고 담을 쌓고 있는 남녀노소의 인파에 놀랐다. 왕년에 카라얀 공연 때도 보지 못한 규모의 인파였다.
박학다식한 진은숙의 ‘앨리스’는 헨델, 엘가, 라벨, 거슈윈, 리게티 등등을 떠올리게 하는 수많은 패러디풍의 음악적 인용과 함께 뭇 소재와 형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폴리스틸리스틱(다양식성)’의 음악. 그것은 음향의 팔레트로 그린 ‘소리의 그림’, 음향과 음악 형식의 만화경!
다만 나는 ‘앨리스’의 무대장치와 조명도 맡은 아힘 프라이어의 연출엔 썩 만족할 수 없었다. 음악을 살려야 할 연출이 음악을 밀어젖히고 지나치게 까발리며 나서고 있다는 인상이다. 나는 눈을 감고 ‘앨리스’의 음악만 들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 봤다.
다행이다 싶은 것은 ‘앨리스’의 DVD판이 늦어도 내년엔 나오리라는 소식이다. 특히 ‘앨리스’의 세계 초연을 뮌헨에 넘기고 만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플라시도 도밍고가 DVD만은 딴 데보다 먼저 내기를 희망한다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보도하고 있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