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생활 17년 동안 대통령 선거 때만큼은 ‘찰떡궁합’을 과시했던 이모(45) 교수 부부. ‘누구를 찍느냐’ 문제를 놓고 의견이 다른 적은 없었다. 신기할 정도로 언제나 의견이 착착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연말 대선을 앞두고 상황은 달라졌다. 얼마 전 이 교수는 아내와 얘기하다가 아내가 지지하는 후보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교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다 각자 관심이 있는 정책 분야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은 정치, 외교, 국방 등 ‘거국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반면 아내는 교육, 세금, 보육, 취업 등 ‘생활 밀착형’ 이슈들을 꼼꼼히 따져 보고 있었다.
아내는 각 후보가 내세우는 교육정책을 심층 비교하는 날카로운 분석력을 과시하곤 했다. 이 교수가 특정 후보를 거론하면 아내는 “뚜렷한 교육관이 없어 교육정책이 흔들리게 된다. 잘못하면 우리 애들만 고생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 교수는 “대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상이 직장 동료냐, 아내냐에 따라 주제가 완전히 달라진다”면서 “남성은 아직도 ‘국가’에 대해 얘기하지만 여성들은 교육, 노후 등 생활과 밀접한 이슈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 필요
대선에서 여성 유권자와 남성 유권자가 관심을 가지는 정책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올 대선에서 후보들이 부동산 세금 등 경제 관련 정책에 중점을 두는 것은 정치에 대한 국민적 염증 때문이기도 하지만 민감한 여성 유권자의 눈길을 끌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최근 ‘아줌마가 키우는 아줌마 연대’가 전국 여성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관심 있는 국가정책으로 경제(28.1%), 교육(19.8%), 부동산(17.3%), 보육(6.8%), 여성(4.5%) 정책 등을 꼽았다. 정치, 외교, 국방 등 딱딱한 분야는 모두 합쳐도 8%대에도 못 미쳤다.
한국여성정치연구소 함영이 소장은 “생활정치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가정, 학교, 이웃과 같은 생활공동체 활동에 적극적인 주부들이 강력한 정치 소비자 집단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 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집단은 전업주부.
전업주부는 미혼 여성보다 정치적 관심이 높고,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취업주부에 비해 시간적 여유가 있으며 다른 주부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다.
전업주부 이진민(36·서울 도봉구 창동) 씨는 “여성 유권자의 정치적 지식과 관심이 날로 커지고 있는 반면 후보들은 아직 형식적인 정책을 내놓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면서 “먹을거리 안전대책이나 사교육비 절감 대책 등 집에서 아이 키우는 엄마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이 늘 아쉽다”고 말했다.
정치평론가 박성민 씨는 “1960, 70년대 경제성장기에 태어난 여성 중에는 비교적 높은 교육수준에도 불구하고 사회활동에 참여할 기회가 적어서 전업주부가 된 경우가 많다”면서 “이들은 자녀 교육뿐만 아니라 취업, 여성 권리 등의 문제에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엄마 따라 ‘한 표’ 찍는 자녀들
전문가들은 주부 유권자의 파워는 어떤 후보를 택하느냐 하는 것 자체뿐 아니라 투표권을 가진 자녀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어 막강하다고 말한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자녀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C대 2학년 김성철(21·서울 송파구 방이동) 씨는 “학교에서 정치 동아리를 같이하는 친구들을 제외하면 대선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거의 없다”며 “집에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어머니가 미는 후보에게 관심이 가게 된다”고 말했다.
강원대 나정원(정치외교학) 교수는 “요즘 젊은 유권자들은 정치적 이슈보다는 취업 등 현실주의적, 실용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박완정 사외기자 tyra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