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프랑스 파리에 간 노무현 대통령은 동포들 앞에서 경제관(觀)을 내비쳤다. “한국경제가 미국식 이론(理論)에 너무 강한 영향을 받고 있어 걱정이다. 유럽의 좋은 제도나 사고(思考)도 많이 받아들여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는 좋은 사회가 되길 바란다.”
지금 유럽의 제도와 지도자 사고방식은 어떤가.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취임 두 달을 맞았다. 그는 “더 일하고, 더 벌자”는 짧고 쉬운 말과 함께 프랑스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영미(英美)식 시장주의를 해법으로 삼았다. 경쟁과 효율을 북돋워 경제성장을 촉진하려는 것이다. 기업 및 일반 납세자의 세금 경감→기업 투자 의욕과 소비자 구매력 증진→성장잠재력 회복도 전략의 하나다.
그는 내년부터 정부 지출을 현 수준에서 동결하고, 공무원 수를 해마다 3만∼4만 명씩 줄이려 한다. ‘큰 정부’가 아니라 ‘큰 시장’으로 일자리를 만들어 실업률을 낮추겠다는 얘기다. 각료회의에 참석하는 장관 자리는 31개에서 15개로 이미 반 토막 냈다. 그러면서도 외교장관에 야당인 좌파 사회당의 거물(巨物)을 기용하고, 국가기관현대화위원회에도 사회당 중진을 영입했으며,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후보에도 사회당 인물을 추천했다. 부리기 쉬운 내 편의 무능한 코드맨들이 아니다. 국민통합도 말이 아니라 이런 행동으로 추구한다.
메르켈, 사르코지, 브라운의 힘
역대 대통령은 당선 첫해 7월 14일 프랑스혁명기념일에 관례적으로 대사면(大赦免)을 해왔다. 그러나 사르코지 대통령은 사면권 행사를 거절했다. 지도자의 입이 아니라 이런 구체적 결단이 사법부의 독립성, 그리고 법 집행의 엄정성을 높인다.
그는 대학들에 대한 재정 지원을 대폭 늘리면서도, 총장 권한을 비롯한 대학 자율권을 확대하려 한다. 또 명문고(名門高)에 우수 학생들이 더 많이 지원할 수 있도록 학군(學群) 외 선발 인원을 늘려 주기로 했다. 경쟁이 국력의 요체이며, 교육 경쟁력을 우격다짐으로 높일 수 없음을 정책으로 말해 준다. 그는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개혁을 성공시키려고 대(對)언론 접촉과 설득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20일 전에 취임한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는 재계(財界) 지도자 특별위원회부터 구성했다.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의 도움말을 정책에 반영해 산업경쟁력을 강화하려는 뜻이다. 노 대통령이 취임 초 “권력이 기업으로 넘어가고 있다”며 정부와 기업을 권력역학 관계로 본 것과 대조적이다.
브라운 총리는 같은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보다 좌파적이라는 평을 들어 왔지만 경제 교육 분야의 정부조직 슬림화에도 착수했다. 지난주엔 주택정책 입법안을 의회에 냈는데 ‘공급 확대’가 포인트다. 개발 사업자와 토지 소유자를 위축시키는 개발이익 환수제를 유보한 것도 그 일환이다. 2%를 때려잡아 98%를 위한다고 설치는 로빈 후드는 지금 영국에 없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1년 8개월 전 취임할 때 0.9% 수준이던 경제성장률을 작년에 2.7%로 끌어올렸다. 좌파 사민당과 연정(聯政)으로 묶여 있으면서도 세금 인하, 노조의 경영참여 축소, 고용 및 해고 유연화, 산업별 임금협약 구조의 개혁, 건강보험의 고용주 부담 완화 등 친(親)기업정책으로 복지병(福祉病)을 개선한 결과다. 그는 또 유럽연합(EU) 역내 문제뿐 아니라 중동사태, G8 회담 등에서 중재자 리더십을 멋지게 발휘하고 있다. 대미(對美) 신뢰 구축과 국내 경제 안정이 그의 외교 리더십에도 날개를 달아 줬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도 메르켈 독일 총리 못지않게 대미관계 개선에 적극적이다. 거기에 국익(國益)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실종된 대선주자 ‘리더십 검증’
대선이 5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5년을 입으로 때우려는 사람 말고, 메르켈-사르코지-브라운처럼 파손된 나라를 행동으로 복원할 리더십이 절실하다. 우선은 가치관이 꼬여 있지 않아야 하겠다.
지도자가 되려는 인물의 개성과 심리적 특성, 국정철학, 국가통치전략, 정책수행능력을 국가 리더십의 핵심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해(利害) 갈등을 조정·통합하는 능력, 특히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견해도 있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5년 전처럼 ‘과거사 물귀신’만 출몰할 뿐, 진정한 리더십 검증은 실종된 거 아닌가.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