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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전율, 추리소설 20선]부패의 풍경

입력 | 2007-07-20 02:59:00


한 남자가 있다. 한때 잘나가던 권투선수였지만 다친 후 지금은 거리의 해결사로 살아간다. 주로 도둑맞은 물건을 찾아주던 그는 가끔은 좀 더 그럴듯한 일도 해결하곤 한다. 이 남자, 그리 똑똑하지는 않다. 그러나 배짱과 완력은 자신 있는 사람이다. 결혼은 안 했다. 줄곧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서다. 최근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자신과 다르게 사회적 명망도 높고 재산도 많다. 남자는 쓰라린 상실감으로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낸다.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사건을 하나 맡는다. 누군가가 어떤 이를 협박한 것이다. 남자는 새로운 의지로 협박범을 쫓는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뭔가 거대한 음모에 휩쓸린 것 같다. 그것도 정치와 관련된. 이 남자, 위기다. 정치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다.

‘부패의 풍경’의 주인공인 벤저민 위버가 활약하는 시기는 18세기 영국이다. 왕위 찬탈을 두고 영국 양대 정당 토리당과 휘그당이 총선을 앞두고 정면으로 붙는 시대를 배경으로 위버는 좌충우돌하면서도 통쾌한 액션을 선보인다. ‘지극히 정치적인’ 시대에 ‘정치에는 전혀 관심 없는’ 남자의 모험담이 박진감 있게 펼쳐진다.

양당의 정치 공방 속에 우연히 말려든 위버는 소설의 시작부터 살인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재판정에서 어떤 여인이 쥐여 준 연장을 이용해 가까스로 탈옥에 성공하지만 진짜 고생은 그때부터다. 알몸으로 빗속을 달리던 위버는 취객의 옷을 뺏어 입고 판사를 찾아간다. 판결에 대한 진실과 배후를 말하라고 협박하지만 정치와 관련된 내용이라 위버는 무슨 말인지도 모른다. 급한 마음에 판사의 돈을 갈취하고 도망가는 우리의 파렴치한 주인공은, 그나마 자기보다 유식한 의사 친구의 도움을 받으며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유수의 추리소설상으로 꼽히는 에드거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리스는 역사추리물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작가다. 아무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독자라도, ‘부패의 풍경’ 속 주인공 위버와 숨 가쁘게 영국의 옛 뒷골목을 헤매다 보면 사건의 감을 잡을 만큼 작가의 묘사 능력은 뛰어나다. 사실 그것이 생생한 역사이기도 하다. 18세기 영국의 커피하우스, 술집, 매음굴, 도박판, 재판정, 감옥, 선거 유세장 등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긴박한 사건을 풀어 가는 추리소설에 역사적 고증이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소설을 읽는 재미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재현’이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작가의 입담을 통해 들을 때 독자는 머릿속에서 오감을 작동시킨다. 뜨거운 여름, 더위를 피해 아예 먼 시간으로 떠나는 건 어떨까. 충실히 재현된 소설일수록 시간여행의 훌륭한 가이드가 될 것이다. 거기에 모험도 있잖은가.

최필원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