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거기’ 빠르게 사라진 것들, 영원의 풍경이 되어 빈 가슴 채우고…
스물여섯 살에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이만저만 막막한 게 아니었다. 문학을 공부하겠다고 들어오긴 했지만 또래 친구도 없고 글쓰기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교지편집 일을 하느라 4층 강의실 맨 꼭대기에 내 책상이 놓여 있는 방 하나를 차지하지 못했다면 아마 그 시간들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강의가 끝나면 나는 언제나 동기들 틈에서 빠져나와 비좁고 어두운 계단을 터덜터덜 올라 그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맞은편엔 방이 하나 더 있었는데, 거긴 시인 오규원 선생님 방이었다. 조교가 잠깐씩 자리를 비울 때면 내가 간단한 심부름 같은 걸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선생님 책상 유리 밑에 끼여 있는 흑백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앙상한 겨울 가로수를 선명한 원근법으로 찍어 놓은 시골길이었다. 왼쪽 귀퉁이엔 막 그 길로 들어서는 중절모를 쓴 초로의 남자 상반신이 반쯤 찍혀 있고 길은 저쪽 끝에서 한 개의 소실점으로 모여 있었다. 그저 나무와 길이 있는 흑백사진일 뿐인데 이상하게 볼 때마다 사위가 고요해지면서 저 길 끝엔 뭐가 있을까, 사색에 잠기게 했다. 그 사진이 우리나라 작가주의 사진작가 1세대라고 불리는 강운구 선생님의 ‘1973년, 경상북도 월성군’이라는 걸 알게 된 건 훨씬 뒷날이다. 그 사진을 발견한 뒤론 심부름도 없고 질문도 없는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 방에 들어가 책상 위의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했다. 내가 그럴 때마다 오규원 선생님은 자네도 거기서 뭘 보긴 본 모양이군, 하는 눈길을 보내곤 하셨다. 졸업과 동시에 나는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뜻밖의 선물과 그 흑백사진 한 장을 가슴 속에 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 7년 후 1월, 나는 강 선생과 처음 만나게 된다.
선생이 처음으로 사진을 찍어본 건 1957년 고등학교 1학년 때라고 한다. 그 후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는 ‘사진으로 살겠다고 작정’한다. 동아일보 등과 학원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다 프리랜서가 돼선 ‘샘이 깊은 물’에서 ‘이 마을 이 식구’를 10년 동안 연재하며 농촌의 붕괴된 현실 그리고 산업화와 문명화로 서서히 변해가는 도시의 일상을 찍고 기록한다. 사진은 그럴 때 빠지기 쉬운 목가적 감상이나 곤궁, 부조화가 아니라 삶에 밀착된 서정과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작품이 ‘사진으로 남아 있는 화석들’이라고 말한 선생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지난 현실이 어떠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자라왔고 성장했는지 확인하게 된다. 사진이 기록의 예술이며 특히 선생의 사진이 한 시대를 포착하고 증거를 남기고 발굴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선생의 사진이 보는 사람에게 깊은 사색에 잠기게 만드는 건 그것이 비추고 있는 게 단지 프레임 안에 찍힌 풍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내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첫 만남 이후 이젠 서너 달에 한 번씩 강 선생을 뵐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미식가로 소문난 건축가 박기태 선생이 주선해 까치출판사 박종만 사장, 현대문학 양숙진 주간, 강 선생, 말석의 나까지, 때론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인원이 달라질 때도 있긴 하지만 주로 이렇게 다섯 명이 부정기적인 저녁 모임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자리에 나갈 때마다 은근슬쩍 나는 강 선생 옆자리에 앉는다. 너무 어렵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게 되는 정면에서보다는 옆자리에 앉아 자연스럽게 손의 생김새나 옆얼굴을 쳐다보는 게 더 좋다. 때론 앞면보다 측면, 정면보단 뒷면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기도 하니까.
내가 느낀 대로라면 강 선생이 부드럽다거나 온화하다거나 관대하다고 말하긴 솔직히 힘들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선생은 까다롭고 엄격하며 고집스럽고 편견도 있고 분위기도 맞출 줄 모르고 농담도 잘 못한다. 그러나 나는 예술에 있어서 선생의 엄격함과 까다로움, 고집스러움, 타협하지 않는 의지가 좋다. 선생의 옆모습을 훔쳐보면서 내가 배우는 건 언제 어느 때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는 반듯한 자세뿐만 아니라 바로 언제나 나를 긴장시키는 작가로서의 그 태도다. 예술가로서의 자신감은 외부적인 사건들에 의해 좌우되는 그런 불안정한 구조 위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신념에서 나온다는 것 또한. 게다가 선생은 스타일리스트다. 중절모나 베스트(조끼) 같은 것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어느 땐 사는 게 너무 쓸쓸하다고 짐짓 투정부리고 싶을 때가 있기도 하지만 아마도 선생은 웃지도 않는 얼굴로 그걸 자유의 대가로 받아들이고 살아야지, 라고 곧은 말씀 하실 것 같아 너스레 한번 떨어보지 못했다.
몇 해 전, 선생께 신년 인사가 담긴 엽서를 받은 적이 있다. ‘1973년, 경상북도 월성군’이 프린트된 엽서였다. 다시 또 오래 사색에 잠겼다가 사진을 서랍 속에 잘 넣어두었다. 내 책상 유리 밑엔 이미 선생을 만나기 오래전부터 어렵게 구한 그 사진이 끼여 있으니까. 옷 만드는 걸 배우고 싶다면 이병복 선생께, 요리를 배우고 싶다면 어윤권 셰프에게, 피아노는 이윤수 씨에게 그리고 사진을 배우고 싶다면 물론 강 선생께 배우고 싶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해 달라고 귀찮게 졸라대면 선생께서 다시는 안 만나주실 것 같다. 그렇지요 선생님?
조경란 소설가
■ 조씨 “기다림… 소설과 사진은 닮았죠”
조경란(38·사진) 씨는 중학교 때 사진반에 들면서 처음 사진과 만났다. “문예반에 들까 고민하다 보니 마감이 돼 버려 사진반을 들게 된 건데, (사진 찍는 게) 무척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중동 근로자였던 아버지가 사준 캐논 카메라를 들고 사람도 찍고 풍경도 찍었다. 사진반 학생들끼리 품평회도 했고 전시도 열었다. “내가 접한 첫 예술이 사진이었던 거죠. 문학이 아니라.” 스무 살 넘어선 화실에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했으니 조 씨는 미술과 퍽 가깝게 지낸 편이다.
등단을 하고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가 됐지만 조 씨는 늘 “언젠가 사진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가을부터 미술잡지에 ‘조경란의 미술 이야기’를 연재해 소망을 이루는 디딤돌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직접 카메라를 들고 그림을 찍고 미술관 풍경도 찍을 참이라고 한다. 그는 “요즘 디지털카메라를 몇 개씩 갖고 연습하는 중”이라며 웃었다.
사진을 찍어 보면서 절제와 비율을 배운다는 조 씨. “원하는 조명을 얻기 위해 몇 시간씩 자연광을 기다려야 하고, 구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꼼꼼하게 고민해야 한다. 모든 예술에는 그런 선택의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소설을 쓸 때에도 그렇게 인내하면서 모티브를, 문장을 기다려야 할 때가 있고, 어떤 짜임새를 갖춰야 할 것인가를 놓고 수없이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사진과 소설은 멀지 않다.
강운구 씨 말고도 좋아하는 사진작가가 더 있느냐고 물으니 곧바로 “으젠 아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워커 에번스”라며 작가들의 이름을 나열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강운구 선생님도 모두 좋아하시는 분이래요”라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사진작가 구본창 씨의 전시에 함께 간 적이 있는데, 그때 강 씨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조 씨는 돌아봤다. 후배 작가의 사진을 보고 “아! 참 좋네”라는 말이, 선배의 어투가 아니라 작품에 감동받은 순수한 관객의 목소리였다고 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