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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홍찬식]‘광주비엔날레여, 다시 한번’

입력 | 2007-07-24 19:51:00


1995년 9월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개막되자 광주 시민들은 모처럼 환한 얼굴이었다. ‘비엔날레’라는 말이 생소하던 때라 “비엔날레가 뭐하는 거냐”고 서로 웃으며 물어보는 사람이 많았다. 큰 문화행사가 광주에서 열린다는 것만으로 시민들 마음은 들떠 있었다.

첫 행사는 대성공이었다. 182만 명의 관람객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2년마다 열리는 국제 미술전시회’라는 뜻인 비엔날레는 입장객이 30만 명만 넘어도 칭찬을 받는다. 112년의 역사를 지닌 유명한 베니스비엔날레도 최대 관람객이 100만 명을 넘지 못했다. 감상이 쉽지 않은 미술 전시회의 한계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첫해의 성공

182만 명이라는 관람객 수는 상식을 깨는 것이었다. 시민들이 적극 참여해 준 덕분이었다. 그 안에는 정치적 의미도 담겨 있었다. 시민들은 5·18민주화운동에서 비롯된 광주의 우울한 이미지를 걷어 내고 싶어 했다. 문화예술을 통해 상처를 승화시키는 데 대찬성이었다. 베니스비엔날레가 이탈리아를 디자인 강국으로 키웠듯이 지역경제를 살리고픈 꿈도 있었다.

광주비엔날레는 전국적인 문화행사 열풍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다른 지방자치단체들이 광주를 벤치마킹해 부랴부랴 문화행사를 만들었다. 부산국제영화제, 경주문화엑스포, 전주소리축제 등 숱한 행사가 뒤를 따랐다. 이처럼 불모 상태에서 이뤄진 첫 번째 시도인 만큼 행사를 출범시키는 일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광주비엔날레의 산파역인 강운태 당시 광주시장은 김영삼 대통령과 얽힌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 중앙 부처의 반대에 부닥쳐 고전하고 있던 1995년 2월 김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했다. 강 시장이 “대통령께서 광주비엔날레를 꼭 좀 도와주십시오” 라고 부탁하자 김 대통령은 “그것 참 희한한 것 하데?”라고 되물었다.

비엔날레를 잘 몰랐던 김 대통령은 그날 광주의 각계 대표가 모인 오찬장에서 “정부가 ‘학실(확실)’하게 지원하겠다”고 약속해 성사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첫 행사를 잘 치러 낸 이후 광주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은 유쾌하지 않았다. 관람객 수는 점점 줄어들어 2004년 행사 때는 51만 명까지 떨어졌다. 운영의 주도권을 놓고 내부에서 세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는 실망스러웠다. 전시 수준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가장 심각한 건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진 행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년 광주비엔날레의 예술감독으로 선임된 신정아 씨의 학력 위조가 밝혀지면서 광주비엔날레는 엎친 데 덮친 격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사장과 이사 27명 전원이 사퇴한 가운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이다.

광주비엔날레의 부진은 시기적으로도 좋지 않다. 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비엔날레 개최를 통해 문화의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만 오사카 타이베이 광주 상하이 후쿠오카가 차례로 비엔날레를 창설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요코하마 광저우 베이징이 가세했다. 지난해에는 싱가포르가 새로 뛰어들었다. 광주는 새 흐름을 먼저 포착한 선두주자였으나 당장 코앞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수준 높여 문화 주도권 보여 주기를

최근 세계 미술시장에선 중국과 한국 화가들의 작품이 구미(歐美) 화가 작품에 못지않은 비싼 값에 거래되면서 아시아 미술이 한창 주목받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의 ‘비엔날레 경쟁’도 그 주도권 다툼과 연관되어 있다. 광주비엔날레의 국제 신뢰도에 먹칠을 한 ‘가짜 박사’ 파문은 그래서 더 뼈아프다.

최고 수준의 비엔날레를 만들어 보여 주는 것 말고 다른 돌파구는 없다. 전시의 질을 높여 명성과 권위를 쌓아 나가야 한다. 광주비엔날레의 재편은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첫해 열정과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광주 시민들을 떠올리며 당부하고 싶다. ‘광주비엔날레여, 다시 한 번.’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