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운데를 파고들어라. 잔혹한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타락한 이성의 검은 흡입구. 이런 하수구가 어떤 것인지 평생을 배워 왔다. 익사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방법도 익혔다. 누구에게나 이런 하수구가 있다. 어떤 사람 것은 거대하고도 교활하게 숨겨져 있다. 땅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처럼.”
1968년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카운티의 터스틴 마을. 한 젊은 여자가 죽은 채로 발견된다. 그녀는 ‘미스 터스틴’으로 선발될 정도로 아름다웠던 자넬이다. 자넬은 ‘플레이보이’ 표지에 실린 사진 때문에 ‘미스 터스틴’ 자격을 박탈당했다. 목이 잘린 채 발견된 자넬의 사건을 수사하게 된 사람은 닉 베커. 그의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자넬과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자넬과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던 목사이자 베커가의 큰아들 데이비드, 자넬 사건을 맡게 된 경찰이자 둘째인 닉, 한창 주가를 올리는 기자이자 막내인 앤디의 삶은 자넬 사건을 계기로 큰 변화를 겪는다.
‘캘리포니아 걸’은 미국추리작가협회에서 수상하는 에드거앨런포상(2005년)을 받은 작품이다. 퍼즐을 푸는 듯한 살인사건 해결 과정이 이 책의 유일한 관심사는 아니다. 작가 T 제퍼슨 파커의 통찰력 있는 시선과 매끄러운 문장은 이 책을 1960년대 말의 미국 사회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울로 자리 잡게 했다. 이야기는 19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건이 일어난 1968년까지 이야기가 진행된 뒤, ‘제대로’ 해결을 보기 위해서는 다시 36년의 시간이 걸린다.
전쟁으로 셋째 클레이를 잃은 베커 형제들은 어렸을 적부터 간간이 알고 지냈던 아름다운, 하지만 불행했던 소녀 자넬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한다. 1960년대 미국 소도시를 무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용의자와 수색자는 모두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인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과거사와 그에 얽힌 긴장감이 되살아난다. 이들의 대화와 생활로 그들이 살던 소도시와 시대를 재구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건이 일어났던 1968년의 과학수사 기술은 현재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범인의 유전자가 널려 있는 현장을 두고도 혈액형 외에 범인의 흔적을 알아내기 힘들었다. 저자가 그 시대를 무대로 소설을 쓴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격동’이라는 말 외에 쓸 수 있는 단어가 없던 시절. 대통령이 총 맞아 죽고, 이국의 전쟁터에 갔던 아들은 주검이 되어 돌아와도 이상할 게 없던 시대. 불안하게 들끓는 상태가 지속되던 전무후무했던 그 시대의 공기를, ‘캘리포니아 걸’은 예민하게 포착해냈다.
이다혜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