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00년 작 ‘메멘토’는 두 가지 요소로 항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10분만 지나면 과거를
까맣게 잊고 마는 이른바 ‘단기기억상실증’이란 희귀 질병을
소재로 다뤘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현재에서 출발해 차츰차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독특한 플롯(plot·이야기 전개)이었죠.
영화는 단기기억상실증을 앓는 한 남자의 과거를 양파껍질 벗기듯 한 겹 한 겹 벗겨가면서 남자에 얽힌 충격적인 진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곤 관객에게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
과거에 대한 기록은 100% 진실일까?’》
[1] 스토리 라인
전직 보험 수사관 ‘레너드’(가이 피어스). 아내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는 끔찍한 사건을 경험한 뒤로 그는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립니다. 사건 이후의 기억은 무엇이든 10분만 지나면 사라지고 마는 것이죠. 레너드는 만나는 사람마다 즉석 카메라에 담고, 현상된 사진에 일일이 메모를 하는가 하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내용은 제 몸에 문신으로 남깁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죠. 레너드는 아내를 죽인 범인의 실체에 한발 한발 다가갑니다.
영화는 레너드가 ‘테디’라는 잠복경찰을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레너드는 ‘아내를 죽인 범인은 존 G’ ‘존 G는 바로 테디’라는 자신의 잇따른 메모를 보고 테디에게 복수를 감행한 것이죠.
하지만 영화가 레너드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감에 따라 엄청난 진실이 실체를 드러냅니다. 알고 보니, 문제의 메모는 ‘과거의 레너드’가 ‘미래의 레너드’를 감쪽같이 속이기 위해 스스로 조작한 거짓 메모였습니다. 레너드는 이미 오래 전 범인을 찾아 제거했건만, 그는 ‘미래의 자신’이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엉뚱한 남자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허위 메모를 남겨놓았던 것이죠. 레너드에겐 누군가를 향해 복수심을 불태우며 계속 인생을 살아갈 ‘삶의 이유’가 필요했던 겁니다.
어쩜 이럴 수가…. 자기를 속인 건 자기 자신이었다니!
[2] 핵심 콕콕 찌르기
과거에 대한 기억은 늘 불완전합니다. 예를 들어, 2년 전 헤어진 여자친구를 문득 떠올리는 남학생을 생각해 볼까요? 그는 여자친구와 에버랜드에 놀러 가 꿈같은 시간을 보냈거나 예쁜 커플링을 함께 나눠 끼고 함박웃음을 지었던 아름다운 과거만을 기억합니다. 커다란 고춧가루가 끼여 있는 그녀의 뻐드렁니를 보고 환상이 확 깨져버린 기억이라든지, 독서실에서 낮잠을 자다 막 깨어난 그녀의 입가에 침이 질질 흐르던 기억은 좀체 떠오르지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 이유는, 잠복경찰인 테디가 레너드에게 던지는 이 한마디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넌 거짓을 수도 없이 되뇌면서 네 스스로의 기억을 조작했어. 그래, 넌 네가 믿고 싶은 대로 기억한 거야.”
그렇습니다.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게 인간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 아름답고 멋진 기억만을 떠올리기 마련이죠. 그래서 기억은 불완전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 레너드 역시 ‘기억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레너드는 말합니다.
“기억은 색깔이나 모양도 왜곡할 수 있어. 기억은 기록(record)이 아니라 해석(interpretation)에 불과하니까.”
아, 정말 멋진 말입니다. 기억은 사실 그대로를 옮긴 ‘기록’이 아니라, 여러 사실을 토대로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한 움직이는 결과물이란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기억은 믿어선 안 된다고 레너드 스스로 말하고 있죠. 그래서 레너드는 즉석 카메라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찍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자신의 행적을 낱낱이 메모로 남기며, 심지어는 문신으로까지 기록합니다. 주관적인 ‘해석’이 아니라 객관적인 ‘기록’에 의존해 복수를 감행하려는 겁니다. 불완전한 ‘기억(memory)’이 아닌, 명확한 ‘사실(fact)’에 따라.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갈깁니다. 글쎄, 객관적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레너드가 남긴 기록이 알고 보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거 아닙니까? 자기 스스로 꾸며낸 허위기록이었다는 거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영화가 품고 있는 궁극적인 메시지에 다가서게 됩니다. 기억은 불완전해서 위험하지만, 객관적인 듯 보이는 기록은 훨씬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죠. 조작된 기록은 주관적인 기억보다 백배 천배 잘못된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3] 종횡무진 생각하기
영화 ‘메멘토’에 담긴 메시지를 ‘역사’라는 대상에 확대·적용해 볼까요? 역사란 인류 과거사에 대한 일종의 ‘기억’입니다. 기억이 불완전하듯 역사도 불완전할 수 있죠.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남겨진 기록에 의거해 역사를 판단하려 합니다.
그런데 만약 영화 속 레너드가 자기 스스로에게 남긴 메모처럼, 역사의 기록이 허위일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걸까요? 삼국유사 삼국사기와 같은 역사의 기록은 100% 진실일까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도 있습니다. 역사의 기록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집권세력의 계급이나 성향, 목적의식에 따라 아전인수(我田引水·자기에게 이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함)식 역사기록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거나 누락하거나 살짝 비틀어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후대가 보는 역사는 얼마든지 뒤틀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역사기록들을 대조·대비하면서 불변의 진실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됩니다. 사실(fact)과 진실(truth)은 때론 같지만, 때론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여러분, 얼마 전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이던 한 대학교수가 알고 보니 학력을 위조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해당 대학은 미국 예일대 전화번호가 적힌 가짜 박사학위 증명서 한 장을 팩스로 받고선 이를 철썩같이 믿었죠. 그만큼 문서나 기록은 무시무시한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숨겨놓는 위장막일 수도 있는 겁니다.
‘메멘토’가 말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도 못 믿는데 어찌 기록 따위를 믿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아, 정말 무서운 세상입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