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공포를 느끼면 부신에서 공포 호르몬이라고 부르는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이때는 심박동이 빨라지고, 혈관 수축으로 혈압이 오르며, 피부가 수축되어 솜털이 곤두선다. 그 결과 얼굴이 창백해진다.
이런 상황이 돌발적으로 나타난다면 아주 끔찍한 기억으로 남지만, 의도된 것이라면 점점 그 자극에 중독된다. 이것이 사고나 범죄에서 느끼는 우발적 공포와 스릴러를 읽으면서 느끼는 공포의 차이다. 스릴러는 다른 장르보다 치밀하고 밀도 있는 구성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스릴러는 사실성과 함께 전문성이 요구된다. 허구라는 전제하에서는 독자를 상황 속으로 몰입시키기 위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명료한 얼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테스 게리첸의 ‘외과의사’도 스릴러물의 보편적 범주를 따르고 있다. 4명의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했던 사내가 마지막 희생자로 택한 여성의 총에 죽는다. 그런데 3년 뒤 사내의 범죄 수법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당한 여성들이 발견된다. 범인의 행각이 마치 의사가 해부해 놓은 시체와 흡사하다고 해서 ‘외과의사’로 불리는 살인범. 그 악마를 여형사 제인 리즐리가 쫓는다.
이 책의 주인공은 경찰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메디컬 스릴러로 분류된다. 왜일까? 그것은 범인이 사이코패스이기 때문도 아니고, 저자가 의사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전면에 흐르는 배경들이 모두 의학적 장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 풍경과 수술 묘사의 사실감은 물론이거니와 범인의 살인 방식,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 결과들은 잔인하고 실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인 듯 생생하다. 필자는 의사인데도 장면들이 갖춘 압도적인 설득력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하나하나 소리 없이 사라져 가는 여인들, 경정맥을 파고드는 메스, 피부를 가르고 자궁을 적출하는 검은 그림자. 그러나 그 손길은 생명을 구하는 의사의 손길이 아니라 생명을 앗아가는 냉혹한 손이다.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것을 서서히 느끼며 죽어 가야 하는 여인들. 더구나 이 여인들은 모두 과거에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피해자이다. 범인은 누굴까? 왜 이 가여운 여인들을 제물로 삼아 피의 카니발을 벌이는 것일까? 범인은 마지막 한 페이지까지 독자들의 머릿속에 아드레날린의 폭포가 뿜어져 나오게 한다.
이 책은 독일 의대생들의 추천도서가 될 정도로 의학적 감수가 철저하다. 지나치리만큼 사실적이기도 하다. 거기에 사람을 살리는 메스가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는 아이러니, 더럽혀진 몸과 피의 제전과 같은 섬뜩한 알레고리들이 부비트랩으로 감춰져 있다. 폭염이 예상된다는 올여름, 피서 계획이 없는 분들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박경철 신세계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