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이 며칠간 한국과 한국인에게 전례 없는 존경심을 갖고 말할 정도로 용감한 항전이었다.”(영국 신문기자 F A 매켄지의 저서 ‘자유를 향한 한국의 투쟁’)
그들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인’이었다.
1907년 8월 1일.
서울은 새벽부터 비가 퍼부었다. 3441명의 대한제국 시위대 장병들에게 오전 10시까지 동대문 밖 훈련원(현 국립의료원 자리)에 맨손으로 모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군사훈련’이라고 했지만 실은 ‘군대해산식’이 목적이었다. 일제가 꾸민 간계였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군대해산 소식을 전해들은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격분한 시위대 장병들은 무기를 들었다.
대한제국 시위대의 마지막 투쟁, ‘남대문 전투’의 서막이었다.
일본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전투는 백병전 끝에 일본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숭례문에서 쏜 기관포가 천둥처럼 진동하고 성 안팎의 수백 집이 불탔다.(중략) 여학교 간호부 몇 명이 탄환을 무릅쓰고 인력거에 아군 부상자를 실어 병원으로 옮겼다.(중략) 장안 백성이 돈을 거둬 전사 장병의 장례를 지내고 곡을 한 뒤 돌아갔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당시의 참상을 이렇게 전했다.
국방부가 펴낸 ‘군사(軍史)’에 따르면 이날 일본군은 중대장 1명을 포함해 4명이 죽고 22명이 다쳤다.
우리 편은 장교 11명 등 68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부상했다.
이 저항 정신은 의병 독립군 광복군으로 이어져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됐다. 100년 후 한국군은 최신예 전함 이지스함을 보유할 정도로 성장했다.
역사의 수레는 ‘영광’과 ‘치욕’이라는 두 바퀴로 도는 걸까. 당시 상당수 대한제국 군대 지휘관들은 “장교는 해산 대상이 아니다”라는 일제의 말에 넘어가 부하를 회유하고 탄환을 회수하는 일에 앞장섰다고 ‘군사’는 평가하고 있다.
8월 30일 ‘장교 해산’ 명령이 떨어지자 장교들은 조용히 사라졌다. 64명의 해산 군인 출신 의병장 가운데 장교는 13명뿐이다.
역사는 ‘남대문 전투’의 진정한 승자로 그들을 기억한다. 100년 전 서울 한복판에서 지도층의 배신과 망국의 한(恨)을 안고 스러져 간 이름 없는 ‘마지막 군인들’을….
박용 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