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동트기 전, 어스름한 무렵.
택시가 텅 빈 시내를 달리다 한 가게 앞에 멈춰 선다. 검은 선글라스와 검은 드레스 차림의 여인이 택시에서 내려 가게로 발걸음을 옮긴다.
들고 있던 봉투에서 뭔가를 꺼내는 여인. 커피와 빵 한 조각이다. 커피를 마실 때도, 빵을 먹을 때도 여인의 눈길은 진열장 안의 물건을 떠나지 않는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첫 장면. 헨리 맨시니의 ‘문 리버’가 은은하게 깔리는 이 장면은 두고두고 영화팬들의 뇌리에 여운을 남겼다.
검은 드레스의 여인 홀리(오드리 헵번)가 넋을 잃고 서 있던 가게는 뉴욕의 보석 전문점 ‘티파니’였다. 티파니는 홀리의 꿈을 상징한다. 눈앞에 보이지만 손에 넣기 힘든 것, 바로 상류사회로의 진입이었다.
영화 속 가게가 있는 위치는 홀리의 꿈을 더욱 부각시킨다. 뉴욕 맨해튼 5번가. 명품 가게가 몰려 있는 이곳은 그 이름만으로도 전 세계 수많은 여성의 판타지요, 로망이다.
5번가가 개통된 것은 1824년 8월 2일. 남쪽 워싱턴 스퀘어파크에서 시작해 북쪽 할렘 강까지 맨해튼을 동서로 가르는 핵심 도로다. 처음엔 13번 스트리트까지만 개통됐다. 당시엔 상점 한 곳도 없는 주택가로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1921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에디스 워튼의 소설 ‘순수의 시대’에는 1870년대 5번가와 5번가 사람들의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밤이 되면 5번가는 적막에 잠겼다. 누가 어떤 집을 밤늦게 찾아가기라도 하면 다음 날엔 소문이 퍼졌다.”
직업이나 능력보다 혈연과 가문이 더 중요하던 시절, 5번가 주민들은 어떤 집안끼리 내밀한 왕래가 있느냐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1906년 평화롭던 주택가에 ‘사건’이 벌어졌다. 벤저민 올트먼이 ‘올트먼 앤드 컴퍼니’라는 대형 백화점을 세운 것. 조용한 환경을 즐기던 부자들은 북쪽 센트럴파크 옆으로 집을 옮기기 시작했다. 빈자리엔 가게가 속속 들어섰다. 5번가의 미드타운은 그렇게 쇼핑 거리로 탈바꿈했다.
그동안 한국에선 미국 비자가 없어 5번가에 대한 꿈만 꾸던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런 이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나왔다. 내년 하반기부터 90일 이내 체류에는 비자가 필요 없다는 것. 돈은 있지만 미혼이라는 사실 때문에 비자를 못 받았던 ‘골드 미스’들이 대거 뉴욕으로 향할 것으로 여행업계는 예상하고 있다.
뉴욕 5번가의 명품 가게들이 한국인 직원을 앞 다퉈 채용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