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은 ‘한국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미항(美港)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다도해에 둘러싸여 파도가 잔잔하다. 임진왜란 전만 해도 통영은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통영(統營)이라는 이름은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영(統制營)에서 유래됐다.
우리의 문화예술은 통영 바다에 크게 빚졌다. 소설가 박경리, 음악가 윤이상, 시인 김춘수 유치환, 시조시인 김상옥, 극작가 유치진(유치환의 형), 영어 소설 ‘꽃신’의 작가 김용익(김용식 전 외무부 장관의 동생), 화가 전혁림, 조각가 신문섭 씨가 통영 출신이다. 화가 이중섭은 1953년 부산 피란 시절 아내가 일본으로 떠난 뒤 예술을 사랑하는 통영 사람들의 도움으로 6개월간 체류하며 ‘황소’ 같은 유화 대표작을 그렸다.
박경리(81) 씨가 얼마 전 원주 토지문화관을 찾은 진의장 통영시장에게 “죽으면 통영 바다가 보이는 곳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통영에는 박경리기념관이 세워진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마을에는 ‘토지’의 무대 최참판댁이 관광객을 끌고 있다. ‘토지’의 산실(産室) 원주에는 토지문화관이 있다. 그러나 정작 작가의 고향이고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인 통영에는 작가를 기념할 건물 하나 없는 것이 통영 사람들의 아쉬움이었다.
박경리 윤이상 유치환의 고향
박 씨가 고향의 기념관에 보낼 물품 목록에는 재봉틀과 3층장, 국어사전이 들어 있다. 재봉틀은 젊어서 남편을 잃고 딸을 키우며 생활을 꾸린 도구이다. 통영산(産) 3층장은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박 씨는 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소목장(小木匠)이 통영을 대표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국어사전은 글을 쓸 때마다 들춰보던 낡은 것이다. 그의 생활, 뿌리, 문학을 상징하는 물품이다.
일찍 결혼해 인천 서울 원주에서 산 박 씨는 평생 통영 바다를 그리워하면서도 생전 통영에 가지 않겠다는 고집이 있었다. 토머스 울프의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에서처럼 더 큰 세상을 찾아 나섰던 작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향과 불화(不和)했다. 박 씨와 고향을 화해시킨 사람이 진 시장이다.
진 시장은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개인 전시회를 세 차례나 연 화가다. 박 씨가 “통영 바다가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친지가 통영항을 그린 진 씨의 수채화를 선물하면서 30년 인연이 시작됐다. 박 씨는 2004년 가을 진 시장의 초청으로 50년 만에 통영을 찾았다. 중앙시장에서 해물을 파는 아낙네들도 고향을 찾은 대작가를 반색했다.
하동군 평사리는 ‘토지’ 같은 대하소설의 무대가 되기에 알맞은 환경을 갖추었다. 마을 앞에 악양 넓은 들이 펼쳐지고 옆으로 섬진강 푸른 물이 흘러간다. 지리산 자락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혼을 불어넣어 쓴 ‘토지’에서 고향을 빼놓은 것이 아쉬웠던지 종결부에서 최참판댁의 재산을 빼앗은 조준구를 통영으로 불러들인다. 조준구의 아들 꼽추는 통영에서 소목장 기술을 배우고 몰락한 아버지를 봉양한다.
통영은 문화예술 도시로 탈바꿈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진 시장은 작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서거 10주년 기념 음악제에 참석해 북한에 거주하는 윤 씨의 부인 이수자 씨를 만나 통영에 지을 음악당에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 씨는 동백림 사건을 거론하며 대한민국 정부가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진 시장의 설득에 이름을 내주었다고 한다. 통영시는 윤이상음악당과 함께 이중섭기념관도 세울 계획이다.
충무공 統制營이 길러낸 DNA
통영에서 문화예술인이 많이 태어난 데 대해 박 씨는 ‘토지’에서 그럴듯한 설명을 한다.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영에 배와 활과 칼을 만드는 전국의 기술자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8년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날씨가 따뜻하고 해류의 영향으로 맛좋은 생선이 나는 통영에 눌러앉았다. 한산섬에서 통영으로 옮겨온 통제영에는 12공방(工房)이 있었고 조정에 진상하던 물품을 만들었다. 박 씨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충무공이 소집한 조선 기예(技藝)의 DNA가 통영 사람들에게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자랑했다.
뜨거운 여름에 남쪽 바다를 찾아 한산섬 제승당(制勝堂)과 욕지도, 국보 305호인 세병관(洗兵館)을 둘러보았다. 진 시장에게서 통영 바다가 낳은 문화예술과 문화도시의 미래상을 들은 것은 망외(望外)의 소득이었다.
황호택 수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