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현실에 구현하고자 하는 정치집단이다. 1996년 아프가니스탄에 탈레반 정부를 세워 2001년 정권을 내주기까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표로 영화와 TV를 금지하고 여성들에겐 부르카를 씌웠다.
이러한 탈레반의 과거 행적을 떠올리면 한국인 인질들의 육성과 동영상을 공개하며 압박하는 그들의 선전전은 격세지감이 들 정도다. 이슬람 교리에 어긋난다며 금지했던 미디어 기술을 신무기로 삼아 적을 겨누는 셈이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최근 낸 보고서 ‘탈레반의 선전 활동’은 사진 촬영조차 금지했던 탈레반이 전단지부터 인터넷, DVD까지 올드 미디어와 뉴 미디어를 망라해 활용하며 적극적인 선전 활동을 펴고 있다고 소개했다.
다민족 다부족 국가인 아프간에서 민심을 얻기 위한 선전 활동이 매우 중요해지면서 테러조직 ‘알 카에다 따라하기’를 추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저자는 영국 국방부 자문 애널리스트인 팀 폭슬리 씨.
▽지역 주민들엔 ‘밤의 편지’=아프간 주민 1000명당 TV 수상기 보유자는 3.7명, 라디오는 6.2명이다. TV나 라디오가 없을 때 효과적인 홍보 수단은 집집마다 대문에 붙여 놓는 전단지 형식의 야간통신(night letter)이다.
여기에 담기는 내용은 주로 협박성이다. ‘딸을 학교에 보내지 말라’ ‘미군에 협조하지 말라’ 등이다. 야간통신이 전달된 후에는 미군 스파이라며 부족 성직자의 목을 베거나 학교를 폭파하는 만행이 이어진 적이 많다.
아프간의 사법 체계가 무너진 일부 지역에서는 탈레반이 샤리아법(이슬람율법)을 적용하는 법정을 운영함으로써 직접적인 대면 홍보활동을 강화했다. 부패한 카르자이 정권의 법정보다 상대적으로 공정하다며 탈레반이 운영하는 법정을 찾는 주민이 많아지고 있다.
▽뉴미디어의 적극 활용=전단이나 대면 접촉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탈레반은 기습 공격이나 스파이 처형 장면 등을 담은 DVD와 CD를 제작해 배포한다. 조악한 수준이지만 탈레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각종 동영상과 함께 소식을 올린다.
탈레반은 언론을 통한 선전도 중시한다. 성명서 작성과 발표를 맡는 ‘미디어위원회’가 별도로 구성돼 있다. 창구는 미디어 대변인. 대변인은 파키스탄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팩스 휴대전화 위성전화를 갖추고 현지와 해외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응한다.
2001년 탈레반 정권 붕괴 후 첫 대변인은 압둘 라티프 하키미였다. 2005년 하키미가 파키스탄 정부에 체포된 후에는 모하메드 하니프 등 3명의 후임자가 이 자리를 거쳐 갔다. 현재 탈레반의 공식 대변인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국인 피랍 사건과 관련해 외신에 탈레반 측 대변인으로 등장하는 카리 유수프 아마디 앞에는 종종 ‘(대변인으로) 알려진(purported)’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탈레반 선전활동의 효과는?=알 카에다와 비교할 때 탈레반의 홍보 효과는 크게 뒤진다는 것이 보고서의 평가이다. 그들의 홍보 역량이 과대평가돼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탈레반의 선전 활동이 외국군 철수를 주장하는 데 집중돼 있을 뿐 재집권에 필요한 아프간의 경제 발전이나 안보 문제에 관한 장기적 비전을 제시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