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없던 20년 전, 우리가 간절히 원한 것은 직선제였다. 직선으로 뽑힌 대통령이 민주주의 안 할 리 없고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할 리는 더더욱 없을 줄 알았다. 1987년 6월 29일 정권은 결국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기본권 신장, 언론기본법 폐지를 선언하며 항복했다.
잘살고 싶다는 열망이 죄인가
그때 민주화를 외쳤던 386 운동권이 대통령을 ‘도구’ 삼아 집권한 지금, 언론기본법 뺨치는 ‘언론 대못질’이 한창이다. 한나라당이든 딴나라당이든 다음 대통령은 내가 뽑는 건데 노무현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집권을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했고, 범여권 대선 후보가 될 게 분명하다는 이해찬 전 총리는 “만만하게 정권을 내줄 것 같은가. 어림도 없다”며 국민을 협박했다.
그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불렀다는 민주주의는 쉽게 말해 국민이 국민 대표를 자유롭게 고용하고 또 해고하겠다는 거다. 그러자면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국민은 먹고사는 데 바빠 언론에 감시를 맡겼다. 그 감시가 싫다고 관청마다 브리핑룸 빼곤 출입금지를 시키고, 공무원에게 뭘 물으려면 허가를 받으라는 건 독재정권도 못 했던 신종 언론탄압이다.
5년 전 우리에겐 희망이 있었다. 새 대통령만 들어서면 조금은 살기 좋아지리라고 믿었다. 어떤 게 좋은 삶일지는 사람마다 달라도 내 자식이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지는 대체로 일치한다. 좌파든 우파든 나는 못 배웠어도 자식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잡아 나보다 잘되기를 바라는 게 부모 마음이다.
참여정부는 이런 소박한 국민의 꿈에 찬물을 끼얹었다. 많이 배우고 출세하면 ‘득세한 기회주의자’로 찍히는 나라에선 내 자식이 많이 배워 출세하기를 바라면 죄인 될 판이다. 1가구 1주택의 재산권도 징벌적 세금으로 위협받고, 기업을 키우면 징벌적 규제를 받는 나라에선 부자도, 글로벌 기업도 나오기 힘들다. 내 자녀, 우리 회사 잘되는 게 행복인데 정권이 그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뺏는 건 심각한 기본권 침해다. 이 전 총리는 “군사정권은 용서해도 동아, 조선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나는 실정(失政)은 용서해도 희망을 뺏은 죄는 용서 못 하겠다.
집권 세력은 저희들이 민주화 외칠 때 옆에 서지 않았던 사람은 적으로 뵈는 모양인데 우리는 놀고먹지 않았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의 수석 경제 논평가 마틴 울프 씨는 1972년 세계은행 직원으로 우리나라를 찾았던 경험을 들며 “정책 결정자들은 수출 주도의 시장경제로 빨리 산업화를 이루겠다는 의지가 확고했고, 국민은 글로벌 경쟁력을 성취하겠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고 지난달 소개했다.
1950년에만 해도 우리와 엇비슷한 수준이었던 인도는 사회주의 경제를 택한 탓에 그 무렵엔 우리 소득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현 집권 세력이 1991년 인도가 버리고, 최근 들어 독일과 프랑스도 떨쳐 낸 정부 주도 경제정책을 고집하는 건 국민을 벌 세우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들은 왜 ‘민주’를 외쳤을까
집권층이 그들만의 힘으로 민주화를 쟁취했다고 믿는 것도 착각이다. 6월민주항쟁 때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선제를 받으라고 퉁명스럽게 말함으로써 역사의 물꼬를 돌려 놨다고 최근 미국에서 출간된 ‘중국 판타지’는 지적했다. 그들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건국부터 참여정부 이전까지의 성취와 행복을 죄악으로 몰고 있다. 그렇게 잘나고 잘하고 있다면 왜 당명을 세탁해 신장개업으로 위장하고, 언론을 억압해 국민의 눈과 귀를 막는지 모를 일이다.
좌파든 우파든 내 자식 잘되길 바라는 것처럼 지배자는 지배를 확고히 하려는 속성이 있다는 게 뇌신경과학적으로 입증돼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권력의 독주를 막는 견제와 균형의 장치를 두고 있다. 여기에 대못질하는 집단엔 민주화 세력이라는 이름이 아깝다. 20년 전 그들은 이러자고 민주주의를 외쳤단 말인가.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