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에서 대선 후보 검증에 검찰을 불러들이는 습성이 생긴 것은 1997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청와대 사정팀에서 DJ 비자금 추적 자료를 건네받아 검찰에 고발했다. 2002년에는 김대업의 가짜 병풍(兵風)을 둘러싼 여야의 고소고발전이 치열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본선이 아니라 예선부터 검찰을 끌어들인 것이 이전 선거와 다른 점이다.
역대 대선에서 정치판과 검찰은 서로 이용하는 관계였다. 1997년 대선에서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은 DJ가 근소하게 상대 후보를 앞서고 있는 국면에서 비자금 수사를 대선 후로 유보한 덕에 정권이 바뀌어도 검찰총장 임기를 채우는 보상을 받았다. 그 뒤로도 검찰 간부들이 대선 때마다 유력 주자에게 줄을 서고 ‘자리 보험’을 든다는 이야기가 정가와 검찰 주변에 흘러 다녔다.
검찰은 한나라당 경선후보의 검증 과정에서 제기된 고소 사건을 수사하면서 “실체적 진실을 밝혀 국민에게 선택 기준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은 고소 고발 또는 범죄 혐의가 있으면 수사해서 사법부에 법의 심판을 요청하는 기관이다. 국민에게 선택 기준을 제시하기 위한 대선주자 검증 수사는 헌법과 법률이 검찰에 부여한 권한 밖의 것이다.
대선주자 검증은 검찰 권한 밖
한나라당의 두 경선후보 진영이 고소로 맞섬으로써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의 말대로 맹수를 안방으로 불러들이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고소 취소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수사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해 ‘도곡동 땅이 제3자의 소유로 보인다’고 애매한 발표를 한 것은 법리(法理)로 볼 때 매우 부적절했다. 특히 경선후보 진영이 검찰에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발표 내용을 조절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검찰 스스로 정치적 독립성을 무너뜨린 행위다.
검찰은 대선주자 검증 수사를 수행하기에는 태생적으로 한계를 지닌 조직이다. 검찰 간부들은 인사권을 쥔 권력에 약하고, 차기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은 강자(强者)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유혹에 빠져 들게 된다. 사법부에서 고법 부장판사와 법원장은 차관급이지만 대법원장이 인사권을 행사한다. 임기가 6년이나 되는 장관급 대법관들도 연임되는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검찰은 다르다. 대통령이 인사권을 쥔 차관급 공직자가 가장 많은 곳이 법무부와 검찰이다. 지검장은 물론이고 대검 부장, 법무부 국장, 고검 차장들까지 차관급이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평생을 가꾼 입신출세의 판도가 달라진다.
대선주자 검증 수사에서 검찰이 내릴 수 있는 여러 형태의 결정은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소가 제기된 의혹에 대해 수사를 하느냐 마느냐, 수사를 대선 이전에 하느냐 대선 이후로 미루느냐, 발표 시기를 언제로 잡느냐, 수사를 어디까지 진행하고 어디까지 공개하느냐…. 이렇게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검찰이 국민의 선택 기준을 제시하겠다는 발상은 대통령후보를 법률적 도덕적으로 심판하고 사실상 인준하겠다는 오만으로 비칠 소지가 있다.
검찰 수사가 여야 후보에게 공평하지 못한 점도 심각한 문제이다. 검찰은 한나라당 이명박, 박근혜 씨에 대한 집중적인 수사를 통해 ‘정 그러면 다 까겠다’고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자료를 갖게 됐다. 그러나 범여권 후보는 아직도 가시화되지 않았다. 범여권은 막판에 ‘원 샷’으로 끝낼 속셈인지, 후보 선출을 10월경에나 할 것 같다. 단일화 이벤트가 벌어지면 최종 후보는 11월 또는 12월에 가서나 정해진다. 고소고발장이 접수되더라도 시간이 부족해 대선 투표일 이전에 수사를 끝내기 어렵다. 결국 대선후보 검증 수사는 여야의 균형 측면에서 불공정하기 짝이 없는 수사다.
여권 후보는 손댈 시간 없어 불공평
19일 한나라당 경선에서 승리한 후보는 검증 수사를 계속 중인 검찰에서 어떤 시한폭탄이 터져 나올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게 됐다. 정상명 검찰총장이 선거가 한창인 11월 23일 임기(2년) 만료로 교체되는 것도 검찰 수사의 변수다.
검찰의 대선주자 검증 수사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폭발성이 높은 사건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수사다. 야당 후보의 발목을 잡는 수사, 해서는 안 될 수사를 검찰이 ‘국민의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는 명분으로 벌이고 있는 것이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