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명다식/정학유 지음·허경진, 김형태 옮김/695쪽·3만5000원·한길사
아들은 닭을 키웠다. 귀양 간 아비는 서신에 조언을 담았다. “양계도 등급이 있다. 제대로 키우려면 관련 책을 읽어라. 면밀히 살피고 부지런히 키워라. 그리고 얻은 경험을 책으로 쓰라.” 성실한 아들은 알았다. 아버지는 실천과 학술에 대한 선비의 자세를 일러 준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바로 당대의 실학자 정약용이었다.
시명다식(詩名多識)은 다산의 둘째 아들이자 ‘농가월령가’의 저자 정학유가 지은 책이다. 제목은 논어에서 따왔다. “공자께서 ‘시경’을 공부하면 온갖 생물을 많이 알게 된다고 하신 뜻을 취했다.”(서문 중에서) 중국의 고서 ‘시경’에 등장하는 생물을 모았다는 얘기다. 거기에 주해를 달았다. 요즘 말로 하자면 ‘시경을 통해 본 생물백과사전’이다.
이런 백과사전 스타일은 18세기 실학자들이 즐겨 쓰던 저술방식이었다. 지배층의 성리학이 현실에 발 닿지 않던 당시, 실학은 책상물림 넋두리에 넌더리를 냈다. 실험과 연구로 이룬 객관적 사실을 추구했다. 자료를 뒤지고 철저히 고증해 실생활에 보탬이 되는 지식을 파헤쳤다.
시명다식은 그러한 실학사상이 옹골지게 살아 있다. 시경의 풀과 짐승, 곤충을 꼼꼼히 분류했다. 중국이나 일본도 시경 생물을 정리한 고서가 있으나 이처럼 세밀하진 않다고 한다. 하긴 풀조차 일반 풀과 곡식, 푸성귀로 나눠 정리할 정도다. ‘시전’ ‘본초강목’ ‘이아’ 등 참고문헌까지 꼼꼼히 밝히는 대목에서는 학위논문이 따로 없다. 시경에는 나와도 상상의 소산일 게 틀림없는 ‘용(龍)’에 설명 한 줄 안 붙인 저자의 현실 감각은 경탄할 만하다.
옮긴이의 열정도 느껴진다. 필사인지라 각각 서로 다른 서울대 규장각본, 일본 도쿄대 소창문고본,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아사미문고본을 일일이 비교했다. 원본에는 없는 생물 삽화를 고서에서 찾아 넣었다. ‘풀 한 포기, 흙 한 줌도 소중히 여기던 선조의 고운 마음씨’를 고스란히 전한다.
입추가 지났다. 이 책에서 가을철 떠오르는 귀뚜라미를 찾아봤다. 아랫목에 속담 한 줄 눈에 띈다. ‘귀뚜라미가 우니 게으른 며느리가 놀란다.’ 게으른 늦여름, 좋은 책 한 편이 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