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만큼 많은 사람과 화물을 정확하고 안전하게 운반하는 교통수단이 또 있을까.
한반도를 넘어 대륙 진출을 꿈꾸던 일제에 철도가 꼭 필요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1899년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이 완공됐지만 일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 건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일제는 1880년대 중반부터 지형탐사를 시작했고, 1896년에는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조선 민중은 저항했다. 측량 기계를 짊어진 일본인이 나타나기만 하면 “땅 뺏어가는 측량꾼이다, 쫓아내라”며 고함을 질렀다. 일본인 측량 기술자들은 장사꾼이나 나그네로 가장하고 비밀리에 측량을 해야 했다.
대한제국 황실도 경부선 건설에 반대했다. 고종은 1896년 두 차례나 일제의 경부철도부설청원서를 거부했다. 그러나 나날이 약해지던 대한제국은 일제의 집요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1898년 대한제국은 일제에 경부선 건설을 허락하는 경부철도합동조약을 체결했다.
1901년 8월 20일 오전 11시. 마침내 서울 영등포에서 경부선 철도 기공식이 열렸다.
경부선 건설은 조선 민중의 피와 땀으로 이뤄졌다.
일제는 헐값에 토지를 수용했고, 조선 백성들을 강제 부역에 동원했다. 일꾼들에게는 품삯 대신 군용표(軍用票) 한 장으로 때웠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은 세계 철도 역사상 가장 적은 비용으로 완전 개통됐다.
개통 당시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13시간 45분이 걸렸다. 그해 9월에는 부관(釜關) 연락선을 매개로 경부선과 일본철도가 연결됐다. 1906년에는 경의선이 개통돼 일본에서 중국 국경까지 가는 길이 열렸다.
1945년 일본의 패망 전까지 철도를 통해 일본에서 군인과 군수물자가 한반도와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곡물과 각종 자원들은 일본으로 흘러갔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철도가 우리나라 사회의 근대화에 기여한 측면도 있다. 광복 후 한국은 일제가 건설한 철도망을 이용해 사람과 자원을 수송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루기도 했다.
철도는 어떤 목적으로 쓰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경부선의 불행했던 역사는 과거의 기억으로 끝나기를….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