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태권 브이….’
신바람 나는 주제가로 유명한‘로보트 태권V’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산 역사입니다.
1976년 김청기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무술 로봇이 등장하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론 세계 최초이기도 하죠.
31년 만에 디지털로 복원되어 1월 재개봉되었는데, 자그마치 75만 명이 관람해 역대 한국 애니메이션 중 최다 관객을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자랑 ‘로보트 태권V’.
하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각에선 비판할 만한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1970년대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경직된 이데올로기와 편견이 녹아 있으니까요.
영화는 그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의 공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답니다.》
[1] 스토리라인
세계 무술대회에 참가했던 선수들이 잇따라 행방불명됩니다. 그들은 악의 무리 ‘붉은 제국’을 이끄는 수괴 말콤에게 납치된 것이죠. 세뇌를 당한 선수들은 붉은 제국 로봇들을 조종하는 조종사로 변해 지구를 위협합니다.
한편 권위 있는 로봇 과학자인 김 박사는 거대 로봇인 태권V를 만드는 작업에 박차를 가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붉은 제국이 보낸 군인들에게 목숨을 잃고 말죠.
김 박사의 아들이자 세계 태권도 1인자인 훈. 아버지의 복수와 지구평화를 위해 일어선 훈은 단짝 친구 영희와 함께 태권V를 조종해 붉은 제국의 로봇 군단에 맞섭니다.
결국 태권V는 붉은 제국의 공격을 막아내고, 악당 우두머리 말콤은 최후를 맞습니다. 이 과정에서 훈은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됩니다. 말콤은 알고 보니 로봇이었고 그 로봇 속에는 오래전 자취를 감췄던 로봇 전문가 카프 박사가 숨어 있었단 사실이죠.
모든 계략은 카프 박사가 꾸민 일이었습니다. 키가 작고 못생긴 카프 박사는 자신의 외모 때문에 동료 과학자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자 복수를 다짐하며 어디론가 사라졌던 인물입니다.
[2] 핵심 콕콕 찌르기
태권V는 기존의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로봇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태권V는 ‘마징가Z’ ‘그랜다이저’처럼 조종사의 작동 명령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죠.
태권V는 조종사인 훈과 정신적으로 혼연일체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정신과 마음의 교류가 고스란히 태권V의 기계적 움직임으로 연결되죠. 다시 말해, 태권도 1인자인 훈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무술 자세대로 태권V가 교감해 움직이는 메커니즘이죠. 인간과 로봇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정신적인 소통을 이루는 것입니다.
훈이와 태권V의 이런 관계가 바로 ‘물아일체(物我一體)’입니다. ‘나’라는 ‘자아(自我)’와 ‘로봇’이라는 ‘타자(他者)’가 만나고, ‘나’라는 ‘주체’와 ‘로봇’이라는 ‘객체’가 하나를 이루며, ‘나’라는 ‘정신계’와 ‘로봇’이라는 ‘물질계’가 합일된 상태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 우리의 로봇 태권V에 이토록 오묘한 철학이 숨어있다니….
[3] 비딱하게 비판하기
이 영화 자체는 도덕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지구의 평화와 정의를 수호하자는 건 절대선(善)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영화 속 설정들을 조목조목 뜯어보면, 영화가 만들어진 1970년대 한국을 지배하던 집단심리와 편견이 요소요소에서 발견됩니다. 자, 하나씩 살펴볼까요?
①냉전적 사고=악의 무리인 붉은 제국을 봅시다. 붉은 제국은 옛 소련, 즉 소비에트 연방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피(血)’의 색깔인 붉은색은 급속한 혁명과 사회 전복(顚覆)의 상징 색깔이었고,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회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은 붉은 제국으로 불렸죠.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대립·갈등 구조는 사라졌지만, ‘로보트 태권V’가 제작되던 1970년대만 해도 한국에선 반공 이데올로기가 최상의 가치로 여겨질 때였습니다.
영화 속 악의 무리의 명칭인 ‘붉은 제국’이 당시 소련의 별칭이라는 점, 그리고 붉은 제국의 상징 마크인 ‘붉은 별’이 북한의 인공기에 등장한다는 점을 우리는 눈치 챌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듯 ‘로보트 태권V’에는 1970년대 한국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은연중 담겨 있죠.
②남성 중심주의=영화 속에서 훈이와 영희는 태권V를 함께 조종하는 파트너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습니다. 영희는 독립된 인격체라기보다는 훈이에게 속한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죠.
영희는 태권도로 큰 바위를 깬 훈이가 “아, 이제 수련은 끝났다” 하고 소리치면 훈이를 부여잡고 “호호, 됐어. 이제 성공이야” 하며 함께 기뻐하거나, 훈이가 “제비호(태권V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비행기)로 박사님을 구해!”라고 지시하면 군말 없이 지시를 따르는 수동적인 존재로만 그려집니다.
영희는 카프 박사의 딸(사실은 인조인간인)인 ‘메리’가 훈과 가깝게 지내자 질투심을 감추지 못하는 속 좁은 인물로도 그려지는데요. 훈을 두고 영희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메리도 질투심의 노예가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나중에 메리는 개과천선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다시 말해, 여성은 감정에 지배되는 미약한 존재로 그려지죠.
하나 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볼까요? 이 영화엔 ‘엄마’가 증발되고 없습니다. 훈의 아버지인 김 박사와 영희의 아버지 윤 박사는 모두 머리도 좋고 무술 실력도 뛰어나고 외모도 잘생긴 ‘만능 인간’으로 그려지지만, 훈과 영희의 어머니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이들의 어머니에 대해서 영화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엄마란 존재가 사라진 이 영화의 설정은 1970년대 남성 중심 사고와 여성에 대한 편견을 드러냅니다. 당시만 해도 어머니란 존재(혹은 여자란 존재)는 지구평화를 위해 뭔가 훌륭하고 위대한 일을 수행하는 주체로 쉽게 생각되지 못했으니까요.
③외모 지상주의=악당의 우두머리인 카프 박사를 볼까요? 그는 키도 아주 작은 데다가 머리도 무지하게 큰 가분수입니다. 게다가 못생겼고요. 카프 박사는 외모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다 결국 ‘사람들을 지배하겠다’는 잘못된 세계관을 갖게 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이는 참 무서운 편견입니다. ‘못생기고 키가 작은 사람은 두뇌는 명석할지 몰라도 생각이 비딱해서 결국엔 사회를 향해 앙심을 품는다’는 편견의 일단을 보여 주는 대목이니까 말이죠. 반면 훈과 영희는 물론 김 박사와 윤 박사는 하나 같이 눈도 크고 멋지게 생긴 인물로 그려집니다.
아, 선과 악이 외모 하나로 갈라진다니….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