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는 가을에 어울린다. 깊은 애수와 서정적 낭만이 가득한 분위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일 저녁 경기 고양아람누리 음악당에서 연주된 서울시향의 ‘브람스 스페셜’은 후텁지근한 여름 날씨를 잊게 할 정도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날 아침 지휘자 정명훈(54·사진) 씨는 미국에 살고 있는 큰누나 정명소(66) 목사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7명이나 되는 정 씨 남매들이 뉴욕에서 유학을 할 때 동생들에게 엄마 역할을 해 주던 큰누나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정 씨는 슬픔을 뒤로한 채 무대에 섰다. 지난해 아버지의 장례식 날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노래를 불렀던 소프라노 조수미 씨처럼 음악가에게 무대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날 연주에서 정 씨는 평소에 비해 절제된 몸짓으로 서울시향을 지휘했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협연한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1번’에선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원래 한몸인 양 녹아들었다. 이어 연주된 브람스 ‘교향곡 3번’의 2, 3악장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연주였다.
정 씨의 형인 정명근 CMI 대표는 “플루트를 전공한 명소 누님은 명훈이를 다섯 살때까지 업어서 키웠고 14세부터 뉴욕에서 공부하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뒷바라지를 해 주신 분”이라며 애도했다. 이틀 전 미국에서 누나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던 정명훈 씨는 서울시향의 ‘브람스 스페셜’ 외에도 일본에서 6차례의 공연이 예정돼 있어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다.
이날 공연 시작 전 서울시향이 앙코르 곡으로 진혼곡을 연주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실제로 오후 리허설에서 단원들은 마에스트로를 위로하는 뜻에서 진혼곡으로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를 골라 악보를 준비했다. 그러나 정 씨는 “개인적인 일”이라며 이를 사양했다.
기립박수를 받으며 등장한 정 씨는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1번’을 앙코르 곡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지휘하는 정 씨의 몸짓을 따라 집시음악의 우수가 스며 나왔다. 서울 시청 앞에서 열린 8·15기념 음악회에서는 관객들이 박수를 따라 칠 정도로 흥겨웠던 이 춤곡이 이날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무곡’으로 들렸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