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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이것이 작가주의 만화의 매력

입력 | 2007-08-24 02:59:00


“문학은 작가만의 세계관, 독창적인 문체가 있어야 경쟁력 있고 오히려 대중적이다. 근데 왜 만화는 조금만 다르게 그려도 ‘어렵다’, ‘실험적이다’라며 외면할까?”

국내 작가주의 만화가들의 화두다. 일반 만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작가주의 만화의 그림과 소재는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조금만 알고 보면 작가주의 만화가 오히려 대중적이라고 말한다.

만화가 허영만 강도하 변기현 석정현 최규석 오세영 씨, 만화평론가 박석환 이명석 씨, 부천만화정보센터 만화규장각 콘텐츠담당 백수진 씨,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박인하 교수, ‘새만화책’ 출판사 김대중 대표, 만화전문출판사 ‘애니북스’ 천강원 편집장 등 12명의 전문가가 ‘엄선하고 또 엄선해’ 추천한 작가주의 만화를 소개한다.

○ 핑퐁(마쓰모토 다이요·애니북스)

‘핑퐁’은 세계 만화가들에게 발상의 전환을 준 작품으로 통한다. 주인공 호시노 유타카와 쓰키모토 마코토는 가타세고교의 탁구부원. 중국 유소년 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콩웬거가 이웃 고교로 스카우트되며 전국고교선수권 대회를 위한 경쟁이 시작된다. 저자는 ‘탁구대’란 한정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스피디하게 연출하기 위해 어안렌즈, 광각렌즈를 통해 본 탁구경기를 그림으로 표현했으며 시합 중인 선수를 한 프레임에 넣는 영화적 기법을 사용했다. 그림은 거친 펜 터치, 강렬한 흑백의 대비로 마치 낙서 같은 그림체도 개발했다. 이 만화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 스포츠만화의 법칙에서 벗어난 주인공. 재능은 있지만 이기고 싶어 하지 않는 주인공 쓰키모토 마코토는 “플레이를 향상시키기 위해 뭔가를 희생하고 싶진 않아”라고 말한다. 피나게 연습하는 ‘슬램덩크’의 강백호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마츠모토 타이요(38) 씨는 ‘아키라’, ‘스팀보이’ 등을 만든 만화가 오토모 가즈히로 씨 이후 가장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만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박흥용·바다그림판)

1996년 ‘대한민국 만화문화상 저작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이희재 씨와 더불어 80년대부터 한국 작가주의 만화를 지탱해온 박흥용(48) 씨의 대표작이다. 조선 후기, 벼슬하지 못한 시골 선비의 배다른 막내아들로 태어나 불평등한 사회를 비관하던 견주는 당대 최고 검객 황정학을 만나 여정에 오르게 된다. 저자는 화면의 반복, 완급 조절, 과장과 축소 등 장면 연출로 등장인물들의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했다. 투명한 선으로 그림을 그려 정적인 느낌을 살리기도 하고 와르르 무너지는 기왓장으로 남녀 간 사랑을 암시하는 등 다양한 표현기법을 사용했다. 전문가들은 이 작품이 무협물과 달리 지극히 사회적이고 사실적인 관점에서 조선 후기 권력, 계급 간 불평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점 등을 들어 철학적 메시지와 그림, 대사가 완벽하게 조화된 최고의 작가주의 만화로 꼽는다.

○ 쥐(아트 슈피겔만·아름드리미디어)

‘쥐’(원제 ‘Maus’)는 유태인 대학살을 다룬 만화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블라덱이 아들인 작가 아트에게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게 하는 이야기로, 기록문학적 세부묘사와 소설의 생생함을 갖췄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이 만화는 나치주의자를 고양이로, 유태인을 쥐로, 폴란드인은 돼지 등 사람을 동물로 바꿔 인종 간의 역학관계를 확연히 드러냈으며 상징과 비유를 통해 예술적인 효과를 극대화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블라덱의 치밀함과 간사함은 쥐의 모습과 흡사하다. 또한 만화 그림의 상식적인 배열 방식을 무시하고 위에서 밑으로 화면을 배치하다가 옆으로 가서 다시 위에서 밑으로 그림을 배열하는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이 천장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묘사하는 등 다양한 형식실험을 시도했다. 1992년 만화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 열네 살(다니구치 지로·샘터)

‘열네 살’(원제 ‘머나먼 고향’)은 시간을 건너뛰는 ‘타임 슬립’이 소재다. 48세 회사원인 나카하라는 출장을 갔다 오던 길, 어머니의 묘지에서 이상한 일을 경험한다. 48세의 의식은 그대로인 채 14세 중학생으로 변해 과거로 돌아간다. ‘열네 살’은 타임머신을 다룬 기존 SF만화와 크게 다르다. 이 만화는 과거로 돌아간 것을 지난 시절에 대한 재경험이 아닌, 지나간 인생, 성인이 된 후 느낀 부모의 마음 등 중년의 경험치로 다시 바라본 인생을 표현하고 있어 문학적 향취가 물씬 풍겨난다. 추천자들은 이 만화만큼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스며 있는 작품을 찾기 어렵다고 밝혔다. 1999년 일본의 제3회 문화청 미디어예술제의 만화부문에서 우수상, 2003년 프랑스에서 열린 제30회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시나리오상을 받았다.

○ 열아홉(앙꼬·새만화책)

여고생의 눈으로 본 세상을 ‘날것’으로 표현했다. 정신지체 여성, 에이즈에 걸린 청년, 날라리 여고생, 존재감이 흐릿해져 가는 할머니 등 우리 사회 주변부 사람들의 모습을 특정 가치관이나 미화 없이 담담히 담아냈다. 저자 앙꼬(본명 최경진·25)는 만화 속 여자 주인공의 외향적 왜곡을 벗어난다. 얼굴의 반만 한 눈망울, 8등신의 인체비율에서 벗어난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의 모습을 사실적 그림체로 표현했다. 저자는 “사소하거나 괴롭거나 즐거운 일들을 겪고, 이런 이야기를 종이에 그려 기억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분류 기준은 어떻게▼

작가주의 만화는 ‘만화가들의 만화’라고도 불린다. 창작자의 관점에서 만화를 보므로 좋은 만화의 기준이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만화와 조금 다르기 때문.

전문가들은 한국의 작가주의 만화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개인, 가족 등 주변 이야기를 자전적 스타일로 다루는 ‘인디 만화’ △이야기는 픽션으로 하되 기존 장르만화의 문법에서 자유로운 ‘탈(脫)장르’ 만화 △이야기 구조보다 비주얼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일러스트레이션’ 만화가 그 것이다.

인디 만화는 1인칭 시점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 가족사 등 소소한 일상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언더그라운드 만화, 대안 만화로도 불린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 실험만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프랑스 만화가 다비드 베(‘창백한 말’), 국내 작가로는 김수박(‘아날로그맨’), 장경섭(‘그와의 짧은 동거’) 씨 등이 인기다.

국내 만화가들이 가장 해보길 원하는 분야는 탈 장르만화. 연애, 판타지, 스포츠, 학원물 등 기존 장르만화의 문법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스포츠물(강력한 상대가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피나게 연습하는 주인공), 판타지물(보잘것없는 주인공이 알고 보니 왕손이며 모험을 통해 영웅으로 재탄생) 등의 익숙한 문법은 식상하다”고 말했다.

장르만화 위주로 구성된 잡지만화 시장이 죽고 온라인 만화가 활성화되면서 대중적인 장르만화를 고집해야 한다는 작가들의 강박관념도 줄었다. ‘고양이z’의 경우 영웅물, 스릴러, 액션 등 전형적인 장르의 특징이 섞여 있다. 강도하, 양영순 씨 등 온라인에서 활약 중인 만화가들은 기존 대중만화가 사용하는 잦은 클로즈업, 극심한 감정 변화 장면 등에서 벗어나 롱 테이크 등 색다른 표현기법을 연구한다.

비주얼을 극대화한 일러스트레이션 만화도 화제다. 일러스트레이션 만화는 장면의 연결이 이야기 흐름과 그다지 상관없다. 한 컷 한 컷 그림으로서의 가치를 더 중시한다. 만화가 아메바피쉬(본명 박현수)의 작품 ‘로봇’은 일러스트, 사진 위에 그린 만화, 노란색 분홍색 빨간색 등 스토리보다는 비주얼로 작품의 분위기와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