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다. 이긴 자가 강한 것이다.’ 도덕이 정치의 목적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면 이 말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명박 씨는 이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강자(强者)다. 그는 단지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아니다. 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그가 차기(次期) 대통령을 향한 등정(登頂)에서 7분 능선은 넘은 것 같다는 세론(世論)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 사람들’부터 정리해야
현 시점에서 보면 여권의 어느 인물이 나서도 대적(對敵)이 되지 못한다. 지지율 차가 서너 배나 된다. 물론 본선이 시작되면 그 차는 좁혀질 것이다. 그러나 여권이 ‘평화세력 대 전쟁세력’이라는 식의 판에 박힌 레퍼토리를 고집한다면 역전(逆戰)은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1987년 이후 치러진 대선 중 가장 싱거운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명박 대통령’은 다 된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되면 정말 나라 경제가 살아나고 갈라진 사회도 통합되는 것일까? 이제 남은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런 의문에 이 씨 자신이 그렇다고 국민에게 확신을 심어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하늘이 두 쪽 나도 도곡동 땅은 내 것이 아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큰형과 처남의 ‘이상한 동업관계’와 관계없음을 주장하거나, 압축성장시대의 ‘CEO 신화(神話)’에 묻어 있는 도덕적 흠결을 애써 외면하려는 어제의 문제도 아니다. 국민에게 진정 희망을 안겨 줄 수 있느냐는 내일의 문제다.
‘경제 살리기와 사회통합’이 새로운 시대정신이라는 그의 진단은 옳다. 그렇기에 당의 ‘강한 자’인 박근혜 전 대표를 이길 수 있었다. 한나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TK(대구 경북)에서 지고도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이념보다 실용을 강조한다. 오른쪽에서 조금이나마 가운데로 움직이려 한다. 그는 과업지향적(task-oriented) 리더십을 지향한다. ‘비대하고 첩첩한 당’을 개혁하겠다고 한다. 다 좋은 얘기다. 하지만 결과물을 보여 줘야 한다. 경선 내내 원수같이 싸웠던 당내 반대파를 아우르며 당을 변화시키는 정치력을 선보여야 한다. 그러자면 먼저 ‘내 사람들’부터 정리해야 한다. 벌써부터 ‘점령군’ 운운하는 소리가 들리도록 방치(放置)해서는 안 된다.
그는 전형적인 성장론자다. 강에 물이 차면 모든 배가 떠오르듯이 성장하면 분배도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는 ‘신(新)발전국가론자’다. 대통령의 역할은 ‘성장 CEO’이며 정부는 권위를 갖춘 효율적 시장조정자의 역할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시대 발전국가론과의 차이는 발전을 사회통합으로 연계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중은 그에게서 논리와 말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화려한 말솜씨와는 거리가 멀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그의 행동이고 실천이며 구체적인 생산물이다. ‘청계천’이 없었다면 오늘의 그도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동안은 내부 경선에서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치더라도 이제는 국민에게 어떻게 일자리를 만들고 청년실업을 줄이겠으며,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함께 만족시킬 수 있을지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청사진을 보여 줘야 한다. 10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여권이 치고 나올 ‘평화공세’를 왜소화, 무력화할 큰 그림을 제시하고 국민을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7·4·7(7% 성장률,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을 구호처럼 되풀이한다면 ‘우파 포퓰리즘’이란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경제와 통합’ 믿음 줘야
대중은 하루아침에 표변할 수 있는 집단이다. 더구나 그는 지난 시대 ‘평균적 도덕성’의 잣대에서 대중에게 빚지고 있다. 상당수 사람이 ‘도곡동 땅의 실제 주인은 이명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지지하는 것은 ‘당신이 경제만 살린다면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다’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따라서 그는 이겼지만 아직 ‘강한 자’는 아니다. 진정한 강자가 되려면 대중의 기대에 몸을 던져 부응해야 한다. 국민이 ‘경제와 통합’에 대한 믿음을 좀 더 확고히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다 된 것이 아니다.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