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do the noses go(코를 어디다 둬야 하죠)?”
순진한 미소로 키스를 어떻게 하느냐고 묻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그녀.
“Was that cannon fire, or is it my heart pounding(대포 소리인가요, 아니면 내 가슴이 뛰는 소리인가요)?”
애절한 눈빛으로 이별의 아픔을 속삭였던 ‘카사블랑카’의 그녀.
“I haven't been afraid since I've known you(당신을 안 뒤부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어요).”
남편을 향한 원망과 사랑을 읊조렸던 ‘가스등’의 그녀.
때론 야생적 순수미가 느껴질 정도로 청초했고 때론 처연할 정도로 우아했던 그녀, 세기의 여우(女優) 잉그리드 버그먼이다.
1915년 8월 29일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스웨덴 출신의 이 여배우에게 미국은 처음부터 열광했다.
버그먼은 할리우드 데뷔작 ‘인터메조’(1939년)로 단숨에 스타가 됐다. “스웨덴에서 온 빛나는 선물”이라는 칭송까지 받았다. 당시 딸까지 둔 유부녀였지만, 자연미가 돋보이는 발군의 미모로 만인의 연인이 됐다.
그녀는 거침없었다. ‘카사블랑카’(1942년)에 출연해 역작을 남겼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듬해엔 ‘가스등’(1944년)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이어 ‘성 메리의 종’(1945년)으로 3년 연속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승승장구하던 그녀의 발목을 잡은 건 사랑이었다.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과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와 그녀의 영화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상원의원 에드윈 존슨이 “버그먼은 할리우드의 타락한 마녀”라고 공개적으로 손가락질할 정도였다.
“한 번도 사랑다운 사랑을 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를 거예요. 내가 불륜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버그먼은 사랑의 아픔으로 좌절했지만, 결국 영화로 재기했다. 로셀리니 감독과 헤어진 뒤 출연한 ‘아나스타샤’(1956년)로 그녀는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버그먼의 연기 열정은 3번의 아카데미상과 4번의 골든글로브, 2번의 에미상 등 각종 상을 휩쓰는 원동력이 됐다.
유방암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끝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았던 버그먼은 1982년 ‘골다로 불린 여인’이라는 TV시리즈를 유작으로 그해 천상의 별이 됐다. 67년 전 지상의 별로 내려 왔던 바로 그날.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