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삶의 흔적이다. 집의 문화는 그 사회의 문화다.”
건축가 김진애 씨는 집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실제 집은 먹고 자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삶의 흔적과 편린(片鱗)을 담고 있는 정서적 공간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노인이 삶을 마감하는 곳이다. 갈라진 벽과 기울어진 담장에도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었다.
언제부턴가 집은 크기나 가격으로 평가되기 시작했으며 잠시 머무르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으로 의미가 축소되기도 했다. 직장인이나 학생의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유머 섞인 인사말에서 바쁜 현대인의 각박한 삶이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풍조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집을 ‘즐기는 공간’으로, 가족의 역사를 쓰는 공간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인스피리언스(insperience) 족(族)’이다.
한국 인스피리언스족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서울 옥수동 김유상 씨 뮤직 룸▼
퇴근 후-주말에 드럼 마음껏 연주… 꿈만 같아요
서울 성동구 옥수동 현대아파트 3층에 자리 잡은 김유상(31·대림 H&L 대리) 노희정(27·피알게이트 대리) 씨 부부의 86m²(26평형) 전셋집에는 ‘뮤직 룸’이 있다.
‘챙’ 소리를 내는 심벌패드, ‘둥’ 소리가 나는 스네어패드 등이 달린 전자 드럼, 아담한 사이즈의 키보드, 어쿠스틱 스네어 드럼, 일본 산요의 CD 플레이어 등이 7m²(2.1평형) 남짓한 조그만 방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드럼 아래에는 5cm 두께의 소음 방지 매트가 깔려 있다. 1990년에 지어진 오래된 아파트라 드럼 치는 소리가 아래층에 울릴까 싶어서다.
김 씨는 지난해 3월 결혼하면서 어릴 때부터 소원하던 뮤직 룸을 확보했다.
촬영: 박영대 기자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어머니는 사춘기를 겪고 있던 제게 ‘스트레스를 조절하고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악기를 하나쯤은 다룰 수 있어야 한다’며 악기를 고르게 했어요.”
김 씨는 이후 드럼에 빠졌다. 고등학교와 대학 생활을 밴드 활동으로 보냈다. 자신의 방에 연습용 드럼을 들여놓고 이웃집 눈치를 봐가며 연습했고, 밴드 연주자들과 함께 연습실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는 한양대 경영학과를 다니면서 음악인을 꿈꿨다. 군에 입대했을 때는 군악대에 지원했으며 1999년 제대한 뒤에는 1년간 휴학하고 가수들의 공연 때 뒤에서 연주를 해 주는 세션맨 생활을 하기도 했다. 직업인으로서 드러머의 길은 너무 험했다. 김 씨는 드럼을 취미로 평생 즐기는 길을 택했다. 2003년 초 대학을 졸업한 뒤 조그만 철강회사의 해외영업 사원이 됐다.
“지금 뮤직 룸에 있는 악기들은 대학 시절부터 하나하나 사 모은 것이에요. 700만 원 정도 투자했습니다.”
뮤직 룸을 만들려면 원래 벽에도 방음시설을 해야 하지만 방의 구조나 비용상 차선(次善)을 택했다. 드럼의 울림은 1만∼2만 원짜리 소음방지매트로 잡아 주고, 큰 소리가 날 때는 헤드폰을 썼다.
김 씨는 일주일에 1∼3번 퇴근 이후 뮤직 룸을 이용한다. 거래처나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드럼 소리와 함께 날아간다. 주말이면 직장인들로 구성된 밴드의 멤버들과 함께 연습실에서 한두 시간을 함께 보낸다.
그는 드럼 연주를 통해 인생을 배운다고 했다. 혼자만 잘하면 되는 다른 취미와 달리 밴드는 다른 악기와 호흡을 맞춰야 한다. 사회생활도 파트너와의 의견조율이 중요하다.
아내에게 남편의 취미는 처음에는 매력 포인트였으나 나중엔 재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함께 즐기는 문화가 됐다. 주말이면 꼬박꼬박 연습실에서 서너 시간을 바치는 남편에게 화낸 적도 많았다. 어느 날 아내 노 씨는 남편의 연습실에 따라가 연주하는 그의 표정을 봤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으며 연주하는 남편의 얼굴을 본 노 씨는 ‘이 취미는 도저히 못 말리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요즘은 부부가 종종 뮤직 룸을 함께 쓴다. 남편은 드럼을, 아내는 키보드를 두드린다. 남편의 취미로 시작한 뮤직 룸이 부부의 화합을 다지는 장소가 됐다.
글=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사진=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서울 평창동 김부곤 씨 홈바▼
하우스 콘서트에 와인파티 환상적
올 3월 우리홈쇼핑(현 롯데홈쇼핑)에서는 핀란드의 원적외선 홈 사우나를 149만 원에 팔았다. 전국에서 28명이 이 사우나 기기를 사갔다. 주부 김순옥(39·인천 계양구 계산동)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사우나에서 땀 빼는 걸 좋아했는데 4, 6세 아이들이 있으니 사우나를 하러 갈 시간이 없었어요. 마침 저렴한 가격에 제품이 나왔기에 바로 주문했어요.”
한 달 동안 두 아이와 함께 집에서 사우나를 즐기던 김 씨는 4월 임신을 했기 때문에 현재는 사우나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11월 출산하면 사우나로 몸조리를 할 계획이다. 또 친구들과 함께 집에서 사우나를 즐기는 계모임도 열 작정이다.
가정용 사우나는 비싼 건 400만∼500만 원이나 한다. 하지만 사우나 마니아들에게는 인기다.
와인 마니아들이 늘어나면서 집에 홈바를 만드는 사람도 많다.
인테리어 디자인 전문회사 코어핸즈의 김부곤 대표도 그중 한 명이다. 사무실 겸 집으로 쓰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그의 집에 설치된 홈바는 열사람 정도가 즐기기에 적당한 크기.
“술은 와인밖에 마시지 못하는 데다 집에서 손님을 접대할 일이 많아 아예 홈바를 만들었습니다.”
김 대표의 집에서 열리는 ‘하우스 콘서트’는 유명하다. 두 달에 한 번 실험예술을 하는 작가들이 마당, 옥상 등에서 무용, 보디페인팅 등 공연을 펼친다. 공연이 끝나면 와인파티가 벌어진다. 10명 이내의 지인을 초대하는 모임도 자주 연다.
홈바를 설치하는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100만 원에 못미치는 중국산 와인냉장고에, 허리 높이의 테이블과 의자만 갖춰 알뜰하게 꾸민 홈바도 있다.
하지만 고급 와인냉장고는 한 대에 수천만 원이나 하기도 한다. 의자는 앉았을 때의 눈높이가 상대방이 섰을 때의 눈높이와 비슷할 정도로 높은 게 좋다. 바텐더와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바’이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과거 집을 최소의 주거공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제는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간으로 바꾸는 사람이 늘고 있다”면서 “유흥문화가 발달하고 가족이 즐기는 문화가 척박한 한국에서는 가족이 함께 모이는 공간, 부부가 단둘이 즐기는 공간으로 집을 꾸며 가족을 집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상도동 최동규 씨 홈 헬스룸▼
사업에 바빠도 운동 열심히 하게 돼
헬스클럽 회원권을 사고도 시간이 부족하거나 흥미를 잃어 헬스클럽을 찾지 않는 사람이 많다. 건강을 챙기기 위해 들여 놓은 트레드밀(러닝머신)이 거실에 자리만 차지하는 ‘대형 옷걸이’로 전락하기도 한다.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하는 최동규(29) 씨도 시간이 부족한 편이다. 그는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에 헬스시설을 들여놨다. 유산소 운동용 자전거와 무산소 운동용 벤치 프레스는 각각 100만 원짜리. 자전거는 사이클 선수들이 비올 때 실내에서 트레이닝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롤러’에 끼워둔다. 롤러를 끼우면 헬스클럽에 설치된 자전거 운동기계와 달리 아래층에 소음이 전달되지 않는다. 롤러까지 합해 모두 250만 원 정도 들었다.
최 씨는 “집에다 헬스시설을 갖춰 놓으니 사업이 바빠도 틈틈이 1주일에 3번은 운동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좋은 헬스기구를 들여 놓고도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운동 효과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조금씩 늘려 가면 싫증내지 않고 운동을 계속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예를 들어 근육을 키우기 위해 덤벨운동을 한다면 무거운 것을 들어 일단 큰 근육을 키운 뒤 좀 가벼운 것을 들어 덩어리진 근육을 갈라야 한다. 또 근육이 피로할 때 운동을 지속하면 젖산이 쌓여 오히려 몸에 해롭기 때문에, 힘에 부칠 정도로 운동했다면 5분 쉬고 다시 운동을 한다. 이런 식으로 운동하다 보면 1시간은 쉽게 지나간다고.
헬스장용 자전거는 지겨울 때가 있다. 최 씨는 좁은 공간에서 운동하기가 지겨우면 자전거를 밖으로 들고 나와 거리를 달린다. 헬스장용 자전거 대신 출퇴근용 시티바이크를 산 것도 운동을 꾸준히 하게 하는 비결.
최 씨는 집의 거실을 색다른 공간으로 꾸몄다. 한쪽 벽에는 벽돌을 붙이고, 다른 쪽 벽에는 꽃 벽지를 발랐다. 격자무늬로 꾸민 벽도 있다. 거실에서 보이는 7개의 벽면에서 사진을 찍으면 각자 다른 집에 와 있는 분위기가 난다.
그는 인테리어 잡지를 살피다 마음에 드는 소재를 골라 벽을 꾸몄다.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사용하다 버린 커튼을 가져오는 등 알뜰한 인테리어로 재료비는 거의 들지 않았다. 2004년 8월 결혼했지만 집을 꾸미느라 시간이 걸려 집들이는 12월에 했다.
친구 최서연 씨는 “집들이 때 친구들이 마치 전시회를 구경하듯 방이며 벽들을 하나하나 둘러봤다”며 “당시 찍은 사진을 본 사람들이 ‘카페에서 찍었느냐’고 묻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울 우면동 김국진 씨 홈 영화관▼
공연장 가기 힘들어 아예 집 안에 극장 꾸몄죠
21년째 텐트의 폴을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 ㈜유엔씨의 김국진(55) 사장 부부는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 겸 공연장을 찾는다. 90인치 스크린에 두세 사람이 즐기기에 딱 좋은 안락한 소파, 완벽한 방음시설이 된 23m²(7평형) 남짓한 이 극장은 서울 서초구 우면동 김 사장의 집 1층에 있다.
최근 일주일간 상영된 영화는 ‘타인의 삶’, ‘일루셔니스트’, ‘굿 셰퍼드’. 극장에는 이 밖에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 실황, 팝가수 셀린 디옹의 공연 실황 등 300여 장의 DVD타이틀이 놓여 있다.
김 사장이 서재를 극장으로 바꾼 것은 2005년.
“원래 영화를 좋아하고 클래식 음악공연도 즐기는 편인데 사업하느라 시간이 부족하고 나이 먹은 부부가 젊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공연장을 찾으려니 눈치도 보여 아예 집에다 극장을 설치했습니다.”
김 사장은 오후 7시 반쯤이면 집에 와 있는 날이 잦다. 저녁을 먹은 뒤 하루의 피로를 공연이나 영화로 푸는 것. 영국 여왕 즉위 50주년을 기념한 공연 ‘궁전에서의 파티(Party At Palace)’를 보면서 팝스타 리키 마틴에 열광하는 아내와 다투는 것도 일종의 재미다.
요즘은 홈시어터를 혼수로 사는 젊은 부부들이 늘고 있다. 혹시 이처럼 방음시설이 갖춰진 방을 만드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드는 건 아닐까. 극장 설치를 총괄한 HMG 홈시네마 디자인의 황문규 대표는 “그렇지 않다”며 “기계에 들일 비용을 방에 투자하면 훨씬 좋은 음향을 누릴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음악가들의 녹음실 수준으로 방음시설을 갖추려면 1000만 원 이상이 들지만 보통 가정집에서는 이 정도까지 욕심낼 필요가 없다는 것. 외부에서 들어오는 잡음, 외부로 새나가는 소음을 최대한 막고, 음이 안에서 잘 울리도록 하는 데 7평짜리 방 하나에 500만 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만일 1000만 원을 홈시어터 예산으로 잡고 있다면 절반은 방음시설에 투자하고 나머지를 기계에 투자하는 게 1000만 원을 모두 기계에 투자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홈시어터 시스템은 비싼 건 수천 만원에 이르지만 오디오 전문브랜드인 야마하 등에서 300만∼500만 원대 가격에 음질이 훌륭한 제품을 내놓고 있어 선택의 폭이 넓다. 대화면 프로젝터를 선택할 때는 보는 사람의 위치에 맞춰 크기를 조절해야 한다. 즐기는 사람의 위치가 스크린 세로 길이의 4배 정도 떨어져 있으면 적당하다.
:인스피리언스(insperience)족(族):
밖에서 즐기던 경험(Experience)을 집안(Indoor)으로 끌어들이는 경향을 말한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본사를 둔 트렌드 전문사이트 트렌드와칭(trendwatching.com)이 지난해 소개한 트렌드. 인스피리언스 족(族)은 집에 홈시어터, 홈바, 헬스장 등을 꾸며놓고 자신만의 삶을 즐기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혹자는 경험을 고취한다(Inspire)는 의미라고도 풀이한다.
글=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사진=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